착한 아이컴플렉스. 타인의 의지에 자발적 반응으로 얻어낸 칭찬이라는 보상은 어린 시절 나의 존재를 확인하는 방법이었다. 할머니를 도와드리기 위해 호미와 물조리를 잡았다. 재래식변소를 지나 다 떨어져 나갈 것 같은 밭으로 통하는 문을 열면 집에서 소일 수준으로 보기에는 넓은 밭이 펼쳐져 있었다. 할머니와 함께, 봄볕에 부드러워진 흙을 호미로 한번 긁어 올렸을 때 징그러울 만큼 자잘하고 많이 끌려나오던 달래뿌리를 보며 흐르는 웃음에 얼굴이 발갛게 달궈져 탄성을 지르던 기억이 난다. 그저 어린 시절의 봄. 식물은 나에게 수확의 즐거움이었다. 처음엔 앵두, 밤, 대추처럼 계절에 따라 입이 즐거워지는 것이 채집의 즐거움이 있었다. 손가락 마디가 조금씩 길어지면서 입의 즐거움과 함께 가꾸는 방법을 배우게 되었다. 영양분을 위해 비료를 뿌려주고 때에 따라서는 병충해를 막는 약을 뿌리기도 하고 비에 젖은 옥수숫대를 세워주기도 했다. 그렇게 취하기 위한 노력과 노동의 가치를 알아가게 되었다.
시장 통 할머니들이 오늘도 물을 길어 남의 땅에 심은 자신의 작물을 살피러 가신다. 창문을 열고 누워 있다 보면 카트 끄는 소리에 눈이 떠진다. 작업실 너머의 땅 주인은 서울 사람이라 들었는데 그곳에는 적어도 열 명은 족히 넘어 보이는 이들이 가꾸어 먹을 자신의 작물을 지극정성으로 돌본다. 밭을 일구며 옆집 대소사에 감 놔라 배놔라 갖은 참견을 하느라 여간 북적이는 게 아니다. 재미있는 것이 가꾸는 곳임과 동시에 나물을 다듬고 난 찌그래기나 땅콩껍질같은 것을 버리기도 하는 일종의 퇴비장이기도 하다. 가꾸어지는 작물과 스스로 크는 풀들의 뒤엉킴, 자라남과 썩어감의 동시상영. 사람의 흔적이 조금씩 뜸해지는 시간대 내려다보는 그 땅은 식물의 땅이다. 사방 조용하지만 그네들 의 방식으로 땅따먹기가 진행된다. 이러했던 식물의 땅이 단 며칠 만에 땅주인의 의지로 조약돌로 잘 포장된 욕망의 땅이 되었다. 무언가가 밀려버린 땅에 대한 이미지는 생경하지만 대수롭지 않다. 새로운 무언가가 들어서기 전 으레 있음직한 일이기에 큰 눈길을 끌지도 않는다. 하지만 시간이라는 힘을 받고 돌 틈을 밀어내는 어린 싹의 발견은 그저 스쳐가는 것이 아닌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대상을 더듬거리는 발견의 시작이다.
#3 집을 나서 발걸음을 옮긴 골목길. 오래 전 내 기억에 집주변의 골목길은 항상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깨끗하게 정리되었던 골목길의 단정함이 깨지기 시작했다. 이는 단장했던 이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겨울에서 봄으로, 여름으로 갈수록 보도블록 돌 틈 사이로 이름 모를 풀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무엇인지 몰랐는데 일주일 정도 지나니 강아지풀인걸 알게 된다. 늘 단정하게 정리된 골목을 떠올리다 식물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발견 한 이후부터 이 초록 풀들에 전과 다른 눈이 가기 시작한다. 그저 어지럽게 피어난다고 생각했던 풀은 태양의 힘이 강해질수록 더 보송해지고 초록 윤이 난다. 하루가 지나면 그 옆에 또 다른 강아지풀이 피어나 옆으로 번지고 이틀이 지나면 발목에 있던 풀이 무릎으로, 또 어느 순간 보면 허벅지로 훌쩍 올라왔다. 강아지풀뿐 아니라 그저 잡초라고 불리는 이름이 있으나 불리지 않는 꽃들이 하나씩 자신의 터를 잡기 시작한다. 햇살의 힘이 바람의 힘보다 약해질 때, 끝에서부터 노랗게 말려들어가는 강아지풀은 끝내 보랏빛 도는 갈색으로 힘없이 머리를 내린다. 듬성듬성 이가 빠진 듯 헐거워져 있는 모습이 그저 초라해 보인다. 변함없이 하루를 시작하는 길에 낯선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끼릭끼릭’-- 약 뿌리는 소리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찬이슬에 끝서부터 말라 그냥 쑥 뽑기만 해도 뽑혀 나올 풀에 누군가 규칙적으로 제초제를 뿌려둔다. 사람이나 식물이나 약치는 일은 조용하지 않다. 노랗게 머무르던 풀이 하루가 다르게 빠르게 얇아져 갔다. 자연스럽기보다 머리가 땅에 툭 떨어지는 균일한 모양으로 타들어간다. 그리고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머리채가 잡혀 뽑혀진 채로 골목길 저 끝에 풀들이 하얗게 말라 뿌리를 드러내고 쌓여있다. 그리고 말끔한 골목길로 돌아온다. 힘겨루기의 승자는 누구인가? 자신의 영역을 정돈하는 인간일까, 실제는 내년을 묻어두고 간 식물의 양보일까?
사람의 땅은 욕망의 땅이다. 종이 하나에 도장하나 꾹 눌러 찍으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땅에 집을 짓고 가꾼다. 내 것이라는 종이 안에서 시작된다. 그 소유 안에서 물리적 권리를 행사한다. 하지만 식물의 땅에는 그 경계가 없다. 식물이 뿌리를 내려 버티면 그 땅은 그 식물의 땅이 된다. 사람들이 입맛에 맞춰 재배된 곡물은 아낌없는 손질을 받는다. 비가 많이 내려 쓸리면 세워주고, 영양분을 잘 흡수할 수 있게 비료를 뿌려준다. 돌을 골라주고 잡풀을 뽑아준다. 하지만 날라 온 풀씨의 힘은 생각보다 강하다. 한번 뿌리를 내리면 가을에 찬 서리가 내리기 전까지 땅속 밑으로 깊이 뿌리를 내리고 더 꼿꼿하게 대를 세운다.
식물은 에너지가 확장해 가는 형태에서 강렬한 힘을 찾을 수 있다. 이 힘의 흐름은 공간의 구조와 시선의 운동성, 물질적 존재감을 잘 드러내고 이러한 내적 조건을 충족시키는 대상으로 식물은 작업의 모티브가 된다. 나는 모티브로서 조우한 식물과의 지속적 교감을 주요한 회화적 표현의 주제로 삼는데 식물의 이미지 보다는 식물 하나하나의 감성과 감각을 시각화 시키는 것을 중요시 한다.
화면에 그려지는 식물들은 부드러운 수동적 이미지 보다는 무질서의 질서를 스스로 만들어 내는 강인한 식물들이다. 나대지나 골목 귀퉁이 어디 즈음에나 있을법한 것들로 개별적 특성이나 용도가 잘 드러나지 않는 식물들이 대부분이고, 때때로 사람들의 경작욕구를 채워주는 것들도 등장한다. 이런 모티브들에 대한 심리적 반영은 개인의 작업이 아닌 타인과의 협업방식을 취하여 서로의 신체적 반응의 흔적을 유기적으로 보여준다. 식물에 대한 참여자 개개인들의 경험과 지각은 기억을 통해 추적되고 회화표현을 통해 표출한다. 몸으로 생각하는 것을 따라가는 과정 안에서 그 에너지의 상태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현대적 의미에서 아이스테시스는 미적판단을 거쳐야 하는데 이 미적판단은 자신의 외부세계를 감성적 지각과 감흥적 지각으로 얻어진 세계를 신체화 하는 지각의 신체화를 통해 나오는 작업일 수밖에 없다.
화면안에 시지각으로 느껴지는 참가자 사이의 자율적인 서건의 기록행위를 통해 신체는 신체로서 작용한다. 이런 과정에서 시지각은 지움과 유보를 결정하는 태도로 나타난다. 타인과의 자리 내어주기 행위는 지속적 상호작용의 결과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화면은 색채들이 비벼지고 뭉그러지는 사이에 문득 모호한 형태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화면에 남는 것은 지워져 버린 원본의 조각들과 더해진 무계획적인 안료의 단층이다. 단층 위로 드러난 뭉그러진 형태들 사이에서 무엇이 사람인지 무엇이 나무인지의 구분은 불분명해진다. 이 과정은 다층적 레이어의 중첩으로 비현실적 공간을 만들어 내고 타인의 붓질과 작가의 붓질 사이에 발생하는 긴장감이 화면에 흔적으로 남는다.
두 주체가 시간차를 두고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는 그리고 지워지고 덧그려지는 작업의 방식은 폭력적이다. 양해를 구하는 것도 아니고 어느 부분을 채우고 들어갈지도 모르는 이 행위는 식물의 존재방식과 같다. 익명적 개체들을 의도적으로 화면 위에서 모아 다루고 있는 것으로 잊혀 지거나 방치된 상태에 대한 기록이기도 한 동시에 식물이 가진 생명의 환기와 시듦의 극복을 드러내는 묘사이기도 하다. 이는 스스로 자라나는 식물의 속성처럼 참여자들의 흔적을 의도적으로 화면에 모아 사건을 기록하여 삶의 방식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차이의 변주
미정지의 대지는 나의 호기심을 이끌어낸다. 대지안의 식물들 그것의 생태와 분류에 대한 지적 호기심보다 존재 자체에의 호기심으로 시지각적 요구라가 보다는 촉각적 동인에 기인한다. 생활주변의 이름 모르는 풀로부터 스스로의 향기로 어필하는 허브에 이르기 까지 요즘 나의 관심은 온통 식물이다. 디지털 인식소로 충만한 현대미술의 현장에 왜 식물을 끌고 나오려는지 스스로에게 자문하면서, 그 이유를 회화로 적어가는 것이 이번에 선보이는 작업의 줄기이다. 그러면 이렇게 식물성을 현상화하고자 하는 사유의 뿌리는 무엇일까? 나는 그것조차도 회화로 번역하는 과정에 도출되는 신체성과 조형소의 물리적 관계, 그리고 심리적 교감의 흐름을 주목하면서 찾고자 한다.
이와 같은 작업의 당위가 회화 안에 결과로 드러나 시지각적 분석과 고찰로 판단될지는 미지수인 채 작업을 진행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인류의 인식은 현상의 모조와 정보의 가장에 대하여 계몽과 반성의 태도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한편으로는 시지각적 양식의 편견을 지우면서, 또 다른 촉각으로 주변을 바라보기와 이를 회화로 번역하는 과정을 주목하기로 하였다. 이와 같은 비정주의 의지는 더 이상 구축적 현상화로는 다원적 현상이 지시하는 불가공약적 존재의 현존을 설명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앎으로 무엇을 특정하고자하는 오류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미분류의 유지 또는 지속적 상호작용의 유지는 마치 호흡과 혈행과도 같은 것이며 나의 작업의 동인이 되는 것이다.
있음과의 조우 그리고 회화적 촉수로의 교감은 조형행위로 존재를 알아가는 과정의 미학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인식된 주변과 미지 사이의 모호함 그러나 이 또한 존재가 아닐까? 식물의 흔들림을 통해서 나는 바람과 향기를 주목하는가? 아니면 식물 자체의 생물학적 특성의 상대성을 바라보는가? 그리고 이와 같은 바라보기를 회화로 번역할 때 어떤 태도를 견지해야하는가? 이러한 물음에 나는 신체로서 작용하고 시지각은 그 다음에 지움과 유보를 결정하는 태도로 진행된다. 이와 같은 이유로 나의 그림은 촉지적이고 심리적이다. 예정하거나 결과하는 것의 만족보다는 과정의 변주 그 자체에 만족하는지도 모르겠다. 마치 살아있음과 함께함 알아감 그 자체가 행복일 수도 있다는 것, 인식은 가장과 특정된 구축으로 오염될 수 있다는 그래서 오히려 상호작용 그 자체로 존재의 현존을 촉각하고 싶은 것이다.
생명력의 환기와 시듦의 극복 이는 식물을 소재로 다루면서 받은 교훈이다. 나의 화면에서 식물성은 관계의 상대성과 나의 심리 그리고 심리를 반영한 신체의 반응으로 나타난다. 이는 식물을 정보로 가져오거나 분류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의 관계에서 하나의 생명체인 인격으로 바라보려는 태도이다. 바라보기와 느끼기, 느낌의 공유와 하나 되기 이 쉽고도 모호한 것을 나는 회화로 번역한다. 미정지의 회화적 번역은 그래서 선명할 수도 없고 익숙하지도 않다. 다만 다가감의 설렘과 회화적 호흡 그리고 감성의 이끌림이 확인될 뿐이다. 이와 같은 행위의 기록으로 나의 회화는 나신처럼 부끄럽게 홍조를 띄고 낯선 공간과 시선 앞에 선다. 또 다른 설렘과 다가옴을 기대하면서. 목선혜.
2012 Herb Scape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2012 허브스케이프, 미정지의 식물성. 작가는 식물을 그린다. 엄밀하게는 식물성을 그린다. 그 식물성은 미정지의 식물성이다. 외관상 식물은 정지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외관상 미정지의 식물성은 오문인 것 같다. 외관상이라고 했다. 이 문장이 오문이 되지 않기 위해선 외관상이 아닌, 내면성이 되어야 한다. 작가는 말하자면 외관상 식물처럼 보이는 식물을 그리는 것에 관심이 없고, 식물을 회화적으로 재현하는 일에 관심이 없다.
내면성 곧 내면의 눈을 통해서 본 식물을 그리는데(다르게는 식물과의 교감을 그리는데), 여기서 내면성은 임의적이고 자의적이고 특히 주관적이다. 그래서 외관상 식물처럼 보이는 식물의 형태에, 식물의 재현 곧 감각적 닮은꼴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 식물성과 내면성은 하나로 통한다. 여기서 식물성은 식물의 몫이고, 내면성은 작가에 속한다. 각각 식물에서 작가에게로, 그리고 작가 쪽에서 식물에로 건너가고 건너온 것들이 교차되면서 교감이 일어난다. 그리고 작가는 바로 그 교감을 그린다. 그리고 그렇게 다시 식물성과 내면성과 교감이 하나로 통한다.
그렇다면 식물성을 지지하고 있는 미정지의 식물성이란 무슨 의미인가. 미정지란 운동성이며 활성(다르게는 항상적으로 이행 중에 있는)이란 의미다. 그게 뭔가. 바로 생명(혹은 생명력)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을 피직스와 나투라로 구분했는데, 감각적 자연을 피직스로, 그리고 감각적 자연을 가능하게 해주는 원인이며 원동력을 나투라라고 했다. 여기서 감각적 자연의 원인이며 원동력으로 치자면 생명(다르게는 에너지) 말고 다른 것일 수가 없다. 그러므로 미정지의 식물성이란 사실은 식물의 생명력에 다름 아니다. 그렇게 다시, 작가의 그림에서 식물성과 내면성, 교감과 생명(혹은 생명력)이 하나로 통한다. 작가는 말하자면 식물과의 교감(식물과 내면 혹은 식물성과 내면성이 교차되는)을 통해서 식물의 생명력(그리고 어쩌면 나의, 존재의 생명력)을 그리고 있었다.
2013-2014 식물채집, 채집공간. 그리고 작가는 식물을 채집한다. 채집은 인위적이고 공간적인 개념이다. 채집이 가능하기 위해선 인위적으로 조성된 공간이 있어야 한다(채집은 분류에 연동된 개념이고, 분류는 물론이거니와 분류에 연유한 개념 이를테면 배열과 배치 역시 공간적 개념이다). 인위적으로 조성된 공간? 인공적인 공간? 바로 자연을 해석한다는 것이며, 인문학적 공간개념으로 자연을 재구성한다는 것(자연의 위상학?)이다. 그렇게 작가는 자연을 매개로 유년시절의 추억을 불러오고, 상실된 자연을 주지시키고(현대인에게 자연은 흔히 상실감의 표상이 된다. 상실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현대인에게 자연과 고향과 원형은 그 의미가 하나로 통한다), 특히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관련한 사회학적 의미를 소환한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 식물은 침실로 그러므로 꿈속으로 소환되고, 내면공간 속에 재구성된다.
공간에 내면공간이 있다면, 마찬가지로 외면공간이 없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식물을 소환하고 채집하는 외면공간은 무엇인가. 바로 화분에 이식된 식물이며, 자연을 미니어처로 만든 수석이며, 자연을 이미테이션으로 만든 인공폭포며 인공동굴이다. 여기서 작가는 식물의 땅에 대비시키기 위해서 욕망의 땅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 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자연을 소유하고 사유화하려는, 아니면 자연을 밀어내고 자본을 들어앉히려는 인간의 무분별한 욕망이 들끓는 땅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그리고 작가는 그렇게 욕망이 들끓는 땅에도 어김없이 풀이 뿌리를 내리고 잡초가 무성한 것을 보고 새삼 자연의 생명력에 놀란다. 이런 외면공간 속에 재편되고 재구성된 자연으로 치자면 개발예정지로 묶인 땅, 그 주변이 공사장 펜스로 둘러싸인 땅 위로 무성하게 웃자란 풀들이며 그 자체 자연의 무한생명력의 생리랄 수 있는 무질서의 질서를 증명해 보이는 잡초들을 예로 들 수가 있을 것이다.
그 자체 잠정적으로만 존재하는 장소란 점에서 미셀 푸코의 헤테로토피아와도 통한다. 푸코라면 욕망의, 혹은 상실의, 아니면 일탈의 헤테로토피아라고 했을까. 그리고 대개 그런 장소는 잠정적인 범죄의 온상이란 점에서 우범의 헤테로토피아? 아니면 불온의 헤테로토피아? 그렇게 작가는 식물채집을 계기로 자연의 의미를 내면공간으로 심화시키고, 외면공간으로 확장시킨다. 그리고 그렇게 자연의 존재론적 의미를 짚는 한편, 그 의미의 지평을 사회학적 문제의식 내지 자의식의 차원이며 수준에 연동시킨다.
2015 식물의 땅, 회화 프로젝트. 전작에서의 특징으로는 색면을 들 수가 있을 것인데, 공간적 개념을 강조하기 위한 자연스런 선택으로 보인다. 그리고 근작에선 색면보다는 추상표현주의를 연상시키는 분방한 붓질로 축조된 회화적 화면이 특징이다. 이 특징은 아마도 작가가 식물의 땅이라는 말로서 함축하고 있는 자연의 생명력에 부합할 것이다. 자연의 생명력과 회화적 화면에서의 유기적인 흐름이 형식적으로 그리고 의미론적으로 서로 견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을 말하자면 작가의 화면은 중층화돼 있다. 예의 회화적인 화면이 배경화면처럼 포치되고, 그 위에 이와는 사뭇 다른 화면이 포개지는데, 마치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섬세하게 묘사된, 사실적이고 재현적이기보다는 양식화된, 그래서 문양과 패턴을 연상시키는 화면이 무슨 투명그림처럼 그 위에 얹힌다. 그렇게 회화적인 화면과 양식화된 식물문양이 서로 대비되면서 특유의 울림을 자아낸다. 그 울림은 아마도 자연의 생명이 들려주는 소리일 것이다. 이를테면 땅에 귀를 기울이면 들릴 것 같은. 생명에 대한 이해(이해는 애정과 연민의 다른 이름일 수 있다)에 민감한 감각적 레이더에 포착될 것 같은.
사실을 말하자면 이 그림은 작가가 혼자 그린 그림이 아니다. 작가의 근작을 그저 회화라기보다는 회화적 프로젝트라고 부르는 이유이기도 한데, 회화가 최종적인 것이 아니라, 회화가 모종의 어떤 일을 위한 매개 혹은 계기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회화와 구별된다. 설명을 하자면 익명의 참가자들이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 참여하게 한 것인데, 대개는 사전에 어떤 그림이 주어진다. 아마도 작가의 다른 그림이거나 이러저런 계기로 작가가 소장하게 된 그림들로서, 그 중에는 사람도 있고 풍경도 있다. 그리고 대개 비전공자들로 구성된 익명의 참가자들이 그 위에 덧그리는데,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색을 칠하기도 하고, 다른 색을 칠해 그림을 지우기도 하고, 그림 대신 사사로운 텍스트를 부가하기도 한다. 이어 그리는 방식과 과정에서 선행된 그림이 무시되기도 하고 이용되기도 한다. 서사로 치자면 하나의 의미가 다른 의미를 부르고 파생하는 매개 내지 계기로 작용하면서 서사가 서사의 다발로 쌓이고 포개지고 확장되는 경우의 형식실험으로 볼 수 있겠다.
그렇게 잠정적인 화면이 표면화되고 나면, 최종적으로 작가가 조율을 하는데, 희한하게도 아니면 당연하게도 작가의 그림이 된다. 엄밀하게는 작가가 처음부터 저 홀로 그린 그림처럼 보이고, 최소한 식물을 소재로 그린 작가의 다른 그림처럼 보인다. 작가의 회화적 관성이 작용한 탓으로 볼 수가 있겠다. 실제로 참가자 중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그린 그림이 지워져 없어졌다고 불만을 토로했다고도 한다. 그렇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그 그림은 지워져 없어진 것이 아니라, 흔적으로 남겨진다. 그 흔적이 미처 작가도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그림을 유도했을 수도 있고, 작가도 예기치 못했던 어떤 비전을 열어 놓았을 수도 있다. 그렇게 이 프로젝트 속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변화가 있다.
변화뿐만 아니라, 이 일련의 프로세스 속엔 꽤나 의미심장한 유비가 발견된다. 존재에 대한 유비다. 나, 자아, 주체, 에고의 실체에 대한 유비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겠지만, 대개 그림을 작가의 아이덴티티 곧 주체의 표상으로 볼 수 있다는 전제 하에서 비로소 이 유비는 작동된다(혹은 유효하다). 이 유비에 의하면 주체는 상호간 이질적인 타자들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집합이다. 나는 내가 보고 들은 것들, 말하자면 타자로부터 나에게로 건너와 나를 형성시켜준 것들의 집합이다. 내가 전면화하는 탓에 나를 형성시켜준 타자들은 보이지가 않지만, 내 뒤쪽에, 내 속에 흔적으로서 등록된다. 롤랑 바르트는 그렇게 흔적으로서 등록된 타자를 너무 많이 고쳐 쓴 나머지 너덜너덜해진 양피지 이론이라고 부른다. 양피지 표면에 최종적으로 등재된 텍스트(이를테면 주체라는 텍스트)는 사실을 말하자면 잠정적인 텍스트에 지나지 않는다. 그 텍스트는 선행된 텍스트들이 그랬던 것처럼 언제든 지워지고 수정될 수 있다. 그러므로 최종적인 텍스트란 사실은 그렇게 지워진 텍스트 전체일 수 있다. 그렇게 주체는 흔적으로 남은 타자들 전체일 수 있다. 회화를 구실로 한 작가의 협업 프로젝트는 이렇듯 주체와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꽤나 흥미로운 형식실험을 예시해주고 있다.
2013 식물채집
조명식 (국민대 교수, 철학박사)
1. 화분을 모으면서 전시를 준비한다. 아직 그림의 이미지가 결정되지 않은 채로 개인전을 준비하는 작가를 만났다. 그는 씨앗을 선별하고 있다. 작년에 실하게 결실한 것들을 잘 말려놓았다가 철을 맞추어 씨를 뿌린다. 원래 철들었다는 말이 농사의 시기를 깨우치고 행동함에서 유래되었듯이 그의 파종은 경험적이다. 그의 작업실은 식물원을 닮아 있다 유리온실처럼 생긴 중정은 물론 옥상정원에 이르기까지 직접 파종하고 기른 식물로 가득하다. 그는 식물의 생장을 관찰한다. 주로 허브인 식물들은 그의 눈에 손길에 길들여진다. 때때로 상에도 오른다. 씨 뿌림에서 관찰과 드로잉, 그리고 섭생까지 동행되는 그의 식물들은 그에게 특정한 가치를 선사하는가보다.
그의 드로잉과 회화는 식물이미지로 가득하다. 왜 식물인가? 묻기가 민망하게 그의 그림은 식물의 채집이면서 식물의 생태로 충만하게 조성되어 있다. 하긴 미술사에서 식물의 이미지를 찾아보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동서를 막론하고 식물과 화훼류는 그림의 소재로 자주 등장하는 것이다. 르느와르, 세잔, 루소는 물론 중국의 거장 리커란(李可染)에 이르기까지 식물은 풍경의 일부로 또는 화면에서 중요한 상징으로 등장하곤 한다. 특히 근대 이후 식물의 형상은 화가들의 관심과 표현영역이 확장되면서 인생을 은유하기 위하여 혹은 주제의 설득력을 위하여 활용되어왔다.
2. 목선혜의 그림에서 식물이 지시하는 지점은 무엇인가? 나는 우선 그의 행동을 통하여 찾아보고자한다. 김희영이 그의 저서 ‘헤롤드 로젠버그의 모더니즘 비평’에서 양식화의 전형으로 가치를 판단하는 것의 위험을 지적하고, 작가의 행동태에 주목하여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제안한 것처럼 그의 그림과 연계된 동선을 따라가 보자. 그는 식물을 시각적으로 관찰함에서 진일보하여 식물과 관계한다. 심고 기르고 돌보는 그 과정이 그림에 스며든다. 어떻게 보면 그는 식물의 정보를 옮기는 것 보다 식물과 함께한 경험들을 나타내고 싶은 것처럼 보인다.
그의 그림에서 이미지들은 부유(浮游) 하기도 하고 재배되기도 한다. 이른바 불특정 화법으로 생경함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일루전을 추구하는 그림과는 현격한 거리두기를 하고 있다. 그는 의지적으로 원근법의 굴레와 명암법의 허울을 벗어 던진다. 그리하여 회화의 역사에서 끈끈하게 행세하던 완성과 닮음 그리고 조화의 기준을 무너트리고 있다.
사실 이러한 면은 의도가 아니라면 실패로 보여 질 수도 있는 위험한 선택이다. 이와 같이 소통의 설득력을 위하여 상용되는 장치를 제거하고 호소력을 취하기 위하여 그는 자율성과 감성의 감각을 들고 나온 것으로 보인다. 리커란(李可染)은 그의 회화 만산홍편(萬山紅遍, 1964)에서 진사(辰沙)를 활용하여 전승된 수묵의 경계를 넘는 실험을 선보였다. 식물이미지에 천착한 앙리 루소의 ‘뱀을 부르는 주술사’는 식물의 과장된 원근이 제거되어 평면적으로 번역되어 있다. 목선혜의 식물들은 한층 더 자율적이며 독립적이다. 그의 이와 같은 회화적 판단과 실천은 식물의 본연에 주목하게 한다. 정보로서의 식물이 아닌 작가와의 관계 항에서의 식물성에 주목하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면에서 식물은 작가 자신의 사유체계를 의미한다. 그래서 그의 그림을 들여다보는 것은 그만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3. 그의 그림들은 식물성의 생경한 회화적 번역으로 긴장을 조성하면서 동시에 건강한 생존을 설파한다. 허브의 전도자인가? 감성회화로 번역된 그의 주변은 무엇으로 부터의 감응인가? 디지털이미지에는 층위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가장된 레이어가 있을 뿐이다. 디지털 시대를 지시하는 모니터 색소로 분방하게 그려진, 그러면서도 질료의 물리적 자율성을 존중하는 목선혜의 선택은 그의 회화가 다면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목선혜의 화면에는 그리는 과정의 층위는 물론 신체성의 흔적들이 자율적으로 조우하게 되는 것이다. 그의 화면에서는 심리적 색상의 변주와 작업공간으로부터 연유된 색면들의 구조가 서로를 탐하면서 스트로크 한다. 감성적 애착관계는 상호성으로 형성된다. 그러므로 작가의 감성적 스트로크는 교류분석 철학의 한 소통도구에서 감성회화의 실천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인공과 자연을 경계 짓지 않고 동일시하는 그의 회화는 자신의 주변을 허브로 인식하고 있음으로 해석해도 좋을 듯하다. 배려와 심미성을 주고받는 허브와의 관계는 그의 세계를 열어보는 열쇠일 수 있다. 이번의 개인전은 감성회화로서의 식물성으로 어떻게 시대를 성찰하고 정화하며 회화의 숲을 이루어 가는지 그 행보를 기대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2012 Herb Scape
계원예술대학교 유진상 교수
페인팅에는 항상 두 가지 질문이 따라다닌다. 왜 회화인가? 그리고 특정한 소재를 다룰 경우, 왜 그 소재인가, 이다. 목선혜의 경우는 ‘식물채집’이라는 주제를 통해 회화적 소재로서 도시 주변의 공간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식물들을 다루고 있다. 2013년까지 그려진 대부분의 회화들이 건물이나 도로, 담장 주변의 텃밭이나 유휴지에서 자라나고 있는 식물들을 그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목선혜에게 있어 식물은 도시나 인공적 공간들 주변에서 자라고 있는 불특정한 식물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 식물들은 아직 특정한 성격이나 용도를 지니고 있는 것들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목선혜의 작품들에서 이 식물들의 개별적 명칭이나 생장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들의 목록이나 이들이 지니고 있는 성격에 대한 참조는 그다지 중요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이 그림들에서 식물들의 개체성은 그것들 자체의 생물학적 특이성보다는 그것들이 갖고 있는 형태들에 의해 드러난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어떤 풀들은 화분에, 어떤 풀들은 모판에서 자라고 있으며, 다른 풀들은 나대지의 헐벗은 공간에서 잡초들처럼 자라고 있고, 또 다른 풀들은 마을 근처의 수풀 속에서 띄엄띄엄 다른 풀들과 흩어져 자라고 있다. 어떤 것은 길고 붉은색이며, 다른 것은 짧고 돌려나기로 자라는 잡초다. 다육식물이 있는가 하면 이끼처럼 낮게 퍼져 있는 선태식물(蘚苔植物)도 있다. 이 식물들의 공통점은 온실이나 잘 준비된 화분에서 자라고 있는 존재들이 아니라 정성어린 손길에서 벗어난, 다소 버려진 식물들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목선혜의 ‘식물채집’은 식물에 대한 특별한 관심이나 전문적인 수집과 분류가 동반되는 채집이 아니라 일종의 ‘비유’와도 같은, 아무 곳에나 던져진 익명적 개체들을 의도적으로 화면 위에서 모아 다루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 식물들이 자라고 있는 장소 역시 식물들의 생육을 위한 공간이라기보다는 도시 혹은 마을의 자투리 공간이며, 여기에서 식물이 자라고 있다는 것은 사람들이 이 개체들에 주의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잊혀져 있거나 방치되어 있는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 하겠다.
목선혜가 이러한 공간들에서 자라고 있는 익명의 식물들을 다루면서 왜 이것을 ‘식물채집’이라고 부르는가 하는 것은 그의 회화적 작업방식을 통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목선혜는 두 가지의 특기할만한 방법을 사용하는데, 하나는 서로 다른 질감으로 칠해진 분할된 화면이고, 다른 하나는 기존의 회화적 표면을 덮어 그리는 방식이다. 화면분할은 <채집공간> 연작 등에서 보듯, 식물이 자라고 있는 화분이나 모판 이외의 공간을 지면과 담장, 혹은 원경과 하늘 등으로 구분하여 평면적으로 채색하는 데서 나타난다. 이 경우, 각각의 분할된 면은 과장된 원근법적 경계들로 구획된 상태로 표현될 뿐 색채나 밀도에 있어서는 단적으로 이차원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러한 공간의 구획은 다소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는데, 왜냐하면 이 경우 그려진 공간은 사실적인 장소라기보다는 연출되었거나 관념적이고 우화적인 무대공간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붓터치가 배제된 밋밋한 색면들은 상당히 기울어진 각도에서 내려다 본 것처럼 그려져 있거나 담장들로 둘러싸인 공간으로 그려져 있다. 이런 식의 공간은 ‘식물채집’이라는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주제가 되는 사물이나 혹은 ‘채집’된 여러 개의 사물들을 한 장소에 모아놓고 보여주기 위한 ‘전시공간’으로서의 공간적 특성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목선혜에게 있어 이 장소들이 지닌 의미가 사실적인 기억의 재현으로 머물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여기서의 공간적 재현은 의도적으로 연출된 것들이며, 이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식물의 회화적 등장을 위한 ‘준비된 장소’를 마련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화면분할은 더욱 평면적이거나 패턴화된 붓질들로 채워진 기하학적 구조물들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 화면에 평면적이거나 패턴화된 붓질들이 식물들을 그리고 있는 행위적 붓질들과 공존할 때, 회화적 통일성이나 일관성을 희생하면서 화면이 획득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반면 ‘덮어 그리기’ 기법에는 모종의 일화가 있다. 오래 작업해 온 지인이 그림을 그만 두면서 자신의 그림들을 작가에게 주었고, 이 버려진 그림들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작가가 그림들 위에 덧그리는 방식을 선택하면서 ‘덮어 그리기’라는 기법이 필연적으로 사용된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 방식은 기존의 화면과 그 위에 그려진 화면들만으로도 다중적인 레이어들의 중첩을 만들어낸다. 이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평면적으로 덮어 칠하는 화면분할 방식 대신 붓터치를 띄엄띄엄 얹어나가면서 기존의 화면을 살려내는 것이 유리하다. 목선혜는 ‘식물채집’ 연작의 후반부에 이러한 기법을 발전시키면서 기하학적 색면들 대신 회화적 제스츄어가 강조된 ‘덮어 그리기’를 시도하고 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식물’은 도시나 마을의 변두리에서 방치된 채 자라고 있는, 드라마틱한 이입의 대상으로서의 연출된 주제에서 본격적인 화가의 신체적 움직임으로 전환될 수도 있어 보인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조앤 미첼의 회화에서 보는 것처럼 식물에 대한 접근이 관념적 편집의 소재에서 실사(實寫)로 이루어지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목선혜의 회화는 현재 두 가지 방향 사이에서 다소 혼란을 겪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는 공간적 연출을 배경으로 하는 서사적 회화이고, 다른 하나는 자율적인 회화적 운동과 사건을 기록하는 것이다. 목선혜의 경우, 작가의 내면적 선택은 후자에 가까워 보인다. 작가의 글 <미정지의 식물성>을 읽어 보면, 구체적 대상으로서의 식물과의 조우나 지속적인 교감에 대한 중요성이 곳곳에 강조되어 있고, 그것을 어떤 의미나 지적 정보로 귀결시키는데 대한 거부감이 나타나 있다. 그에게 있어 회화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구현된다. : “나에게 있어 회화는 신체로서 작용하고 시지각은 그 다음에 지움과 유보를 결정하는 태도로 진행된다. 이와 같은 이유로 나의 그림은 촉지적이고 심리적이다. 예정하거나 결과하는 것의 만족보다는 과정의 변주 그 자체에 만족하는지도 모르겠다.” 다시 말해, 작가에게 있어 회화는 어떤 것을 기술하거나 묘사하는 행위가 아니라 ‘회화적 과정’을 강조하는 노력에 가깝다는 것이다.
다시 원래의 질문들로 돌아가 보자. 왜 회화이고, 왜 식물인가? 식물을 그리는 화가들은 많지만, 그 각각의 접근태도들은 매우 다양할 것이다. 식물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와 운동성, 형태의 확장성과 강렬함, 그것들이 내뿜고 있는 존재감 등은 화가들이 식물을 다루는 주된 이유들이다. 식물들은 ‘도감’에서 볼 수 있듯이 다양한 유형이나 형태들로 인해 정교한 지적 이해와 분류를 위한 대상들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화가에게 있어 더욱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회화적이라는 점이다. 말하자면, 식물 자체가 힘의 흐름과 공간의 구조, 시선의 운동성과 물질적 존재감을 담보하는 탁월한 대상이라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식물은 회화 그 자체의 내적 조건들을 가장 잘 충족시키는 대상이기도 하다. 동양의 ‘사군자’나 풍경화의 식물들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장르들이기도 하다. 이런 기본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식물채집’ 연작은 화가에게 있어 보다 명확한 주제가 될 수 있으리라 본다. 즉 왜 식물을 통해 회화에 다가가는지를 화가 스스로 통찰하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러한 핵심적 진실에 대한 이해를 잘 드러내는 것은 화가에게 있어 쉬운 과제는 아니다. 목선혜의 회화를 보면서, 나는 화가로서의 그가 이 쉽지 않은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지에 대한 걱정과 기대를 품어본다.
일시: 2015년
작가 : 목선혜
평론가 : 홍경한, 이선영, 김성호, 김병수
큐레이터 : 최유진
아르숲메니져 : 김설빈
목선혜 : 안녕하세요. 입주작가 목선혜입니다. 오늘 평론을 해 주신 고충환 선생님께서 개인적인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하셨습니다. 참석해주신 선생님들께서 빈 자리를 대신해 주실 거라 기대합니다. 준비한 자료는 2015년 작품으로 먼저 작품을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2015년 기준으로 PPT자료를 만들다 보니 작업의 진행과정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04년~11년의 자료는 자리에 팸플릿으로 준비해 두었습니다. 대학부터 대학원 시절까지는 자화상에 대한 작업을 많이 했습니다. 유년에 대한 이야기나 스스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주요 이야기였다면 대학원을 마치고 춘천으로 돌아와 재래시장 한 어귀에서 공공미술프로젝트에 참여하며 페인팅을 벗어난 작업을 시도했습니다. 그런데 약 2년의 시간이 지난 뒤 슬럼프가 찾아왔고 그 과정에서 식물이라는 소재로 회화작업을 해야겠다는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춘천에서 태어나고 자랐는데 어릴 적부터 굉장히 밭일을 많이 하면서 컸어요. 펌프질도 많이 하고 여름부터 가을이면 고추를 말리는 일에 놀다가도 소나기가 오면 집을 뛰어가 고추를 걷었던 일이 생각납니다. 아버지께서는 몇 가지 버전으로 고추말리는 법을 알려주시기도 했고 장마가 지면 쓰러지는 옥수숫대를 묶어 세워두는 일들도 종종 있었어요. 처음은 자화상을 그리지 않고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대상으로 식물을 바라보았고, 식물이 주는 에너지, 유년시절의 경험이 정서적 부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생각되어 2012년 ‘Herb Scapr’를 타이틀로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2013년에는 스스로 크는 것과 키워지는 것에 대한 생각을 ‘식물채집’으로 풀어보았습니다. 작물을 재배하던 입장에서 바라보던 풀. 잡풀 같은 것. 김을 맨다고 하죠, 많은 잡풀을 뽑아버리곤 했는데 이때는 무언가를 키우려고 하던 곳에 터를 내리고 있던 잡풀을 새로운 눈으로 ‘발견’하게 되었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공간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015년도에는 ‘지나친것들’가 ‘Land Of Plants’ 타이틀로 전시를 진행했습니다. ‘지나친것들’에 작업한 작품은 붉은 이미지들이 많고 ‘Land Of Plants’의 경우 푸른 이미지들이 많습니다. PPT에 보이는 이미지는 이 두 전시에 선보인 작품을 한곳에 모은 것인데요, 2015년은 스스로 피어나는 것과 키워지는 것을 하나로 묶어 ‘식물의 땅’을 이야기 하게 되었습니다. 2014년부터 타인의 캔바스 위에 제가 덧그리는 방식으로 혼자 그리는 행위에서의 벗어남을 시도했는데 2015년 작업을 진행하면서부터 조금 더 적극적으로 시민들과 함께 표현하는 작업의 방법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캔바스를 하나의 땅이라 생각하고 시민들의 붓질이 날아온 풀씨라 생각하여 함께 그림을 그려나갔습니다. 시민들의 참여는 제가 쓰지 않는 색이나 때로는 가공되지 않은 선이나 색, 이미지들로 나타났습니다. 프로젝트는 10대부터 80대까지 참여해 주셨습니다. 사진 이미지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림은 상단에 보이는 이미지와 같이 다른 작가분이 그리신 큰 인물 이미지가 이미 그려져 있어요. 실제 춘천에서 전시할 때 3층 전시장은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놓았어요. 체험 후 4층 전시장에 가서 관람을 하시면 보시는 분들이 조금 더 편안하지 않을까 해서요. 타인의 개입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작업이었고 에너지적인 부분을 표현하려고 하는 부분이 많아요. 어떤 분들은 보시면서 식물을 그렸지만 굉장히 동물적으로 느껴진다고 말씀하시기도 하세요. 제가 그리는 것은 대부분 나대지의 풀이나 잡초, 때때로 파나 양상추처럼 키워지는 작물을 그리기도 해요. 타인과의 작업은 서로의 행위들이 가져오는 교차적 시선이나 경험, 색상들이 쌓이고 그 안에서 제가 작업하는 색들과 이미지들이 같이 어우러져 이미지를 만들고 싶었어요. 작업에 대한 이야기는 우선 여기까지 드리고 지금부터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홍경한 : 영상작업도 한다고 하지 않았었나요?
목선혜 : 영상작업은 홍나겸 작가님께서 도와주셔서 진행하긴 했는데 편집이 마무리 되지 않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이선영 : 저는 궁금한 게 있어가지고, 작품을 나 혼자 그리는 게 아니라 열어놓는다는 개념이잖아요. 시민들이랑 같이 그리고 그러잖아요. 근데 그건 생각으로는 내가 혼자 그리는 것과 똑같은 것 같고 여럿이 같이 그리면 굉장히 다양하게 나올 거 같지만 관념이 그럴 뿐이지 실제로 진행이 되면 대중들의 생각은 거의 그렇게 다양하지 않은데다가 참여를 했을 때 그것도 겉은 상투화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혼자 그리는 것이 더 비슷할 거고 다른 사람이 참여하면 여러 가지가 있을 것 같지만, 혼자 그렸으면 예전에는 내가 이것을 그렸으니까 이번에는 다른 것을 그려봐야지 하는 차이의 개입이 생길 수 가 있을 것 같고 오히려 여러 사람이 동어 반복적으로 참여하다 보면 나중에 그린 그 결과물 들은 언제나 비슷한 이미지로 남을 것 같거든요. 이상과 현실은 굉장히 틀리다는 거지. 만약에 그렇게 열어둔다 해도 작가가 나중에 그거를 출발로 해서 다시 무슨 가필을 해서 그다음에 자기가 그 작업을 내서 그린다면 모를까 그냥 뭐 참여한다 이거 갖고는 얘기가 안 될거 같아가지고.
목선혜 : 우선은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참여자들에게 전에 그려진 이미지의 30%를 남겨두고 그 층위를 남겨두고 드로잉을 해달라고 부탁을 드렸어요. 그리고 이선영선생님의 말씀에 한편으로 수긍이 되면서 또 한편으로는 아니었던 부분이 저는 확실히 다른 분들이 그려주셨기 때문에 이 평면을 저 혼자 그렸을 때 보다 훨씬 자유롭게 그릴 수 있었어요. 제가 이미지를 자꾸 다듬으려 하는 부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색을 쓰거나 화면을 거칠게 하거나 이런 부분에 있어서 혼자 그릴 때의 한계가 있었었는데 오히려 그런 것들에 대해서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고 프로젝트 참여자에게 무작정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리기 전 식물에 대한 기분이나 느낌, 개인의 히스토리를 먼저 뽑아 이야기 한 뒤 그것을 다시 추상적으로 표현하는 과정을 두어 작업을 진행하곤 했어요. 그래서 재현적인 것들이 아니라 식물의 재현적인 모습이 아닌 그것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나 기운 , 상호적인 반응을 중시한다고 말씀을 드려서 그 지점에서는 좀 괜찮았었어요. 한 부분 인정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제가 식물의 땅이라 해서 스스로 크는 것과 키워지는 것으로 시민들의 그림이 날아온 풀씨로서 스스로 크는 것이라면 제가 그리는 이미지는 어찌 보면 키워지는 식물이었어요. 재밌었던 부분이 20대 참여자는 이미 인물그림이 그려져 있으니까 중간으로 오지 못하고 다 외곽을 장식하듯 가서 그리는데 30대가 되니까 막 가운데로 막 몰려요. 정말 거침없이 다 지워버리고. 40대50대는 중간 중간에 어울리게 그리시고 조금 더 추상적으로 이미지가 나왔어요. 연령대적 특성도 좀 보게 되고 근데 막상 마무리 할 때쯤에는 제가 정원사처럼 화면의 이미지를 가드닝을 하게 되는 부분들이 분명히 있더라고요. 그래서 맨 처음에는 나는 자연스러운 식물의 땅을 이야기 하려 했었지만 어느 순간 이것은 목선혜의 식물의 땅이 되어 버리는 지점에 있어서 전시를 하면서 혼자 피드백을 진행할 때 그 부분에 대한 어려움이 좀 있었던 것 같아요. 내가 어느 선까지 이 거칠고 습득되지 않은 야생성을 그대로 이야기를 하고, 어느 부분까지 개입을 해서 그려야 하는가-하는 부분에서는 좀 고민이 되는 부분이었어요.
김성호 : 질문을 좀 드리고 싶은데 제가 지금 이해한 바로는 선생님이 먼저 바탕칠을 어느 정도하고 관객들에게 그 작품을 줘서 관객들이 30%밑바탕을 남겨 놓고 마음대로 칠하게 한 다음에 선생님이 뭐 지시도 하고 해서 결국에 선생님이 그 위에 가필을 하고 마무리를 짓는 거죠?
목선혜 : 처음에 그려진 그림 자체도 제가 그린 그림이 아니고 그림을 더 이상 그리지 않겠다고 저에게 캔바스를 주신 선배님의 작품이에요. 그래서 아예 제가 그리는 걸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저 역시 처음에는 남의 땅을 개간하는 것처럼 같이 들어가고 10대,20대,30대,40대 나중에 자율학습처럼 오시고 싶은 분들 자유롭게 오셔서 그리면 그분들이 제 그림의 일부를 지우시고 저도 지우고 그리고를 반복해서 작업해요. 그런데 마지막에 전시를 준비 할 때 가 되면 아무래도 제 입장에서는 제가 좀 더 많은 %를 지우거나 부분적으로 선택하는 부분들이 생기더라고요.
김성호 : 마무리는 그럼 다른분들이랑 같이 하는게 아니라 선생님이 혼자 하는건가요?
목선혜 : 네
김성호 : 몇 가지 굉장히 재미있는 구조이긴 한데 이런 이야기가 좀 생각이 나요. 원로. 은퇴하시고 난 교수님들이 조수들이 필요하잖아요, 주로 조수들은 조각계열에서 뭐 돌을 깎거나 그럴 텐데 평면의 경우에는 와꾸를 짠다거나 밑 색칠하고 하는 걸 조수를 쓰잖아요? 그런데 조수를 알바비를 좀 줘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알바비를 주지도 않고 남의 노동력을 착취해서 커뮤니티 프로그램이란 이름 아래 이거를 만들어 내고 있는 거예요. 지금. 그런데 제가 만약에 위와 같은 프로젝트 개념이 최종적으로 선생님의 작품이 지워졌다거나 최종적으로 불특정다수의 익명의 관객들이 작품을 완성하게 된다면, 최종적으로 선생님이 컨트롤하고 최종적으로 그들은 흔적을 남기고 최종결정권자는 작가라는 목선혜를 가지고 간다는 거죠. 그런데 만약에 이런 과정을 더 적극적으로 민다고 한다면 굉장히 의미 있는 작업이 되었을 거 같아요. 그러니까 자기작품이 지워지고 정말 배우지 않은, 습득되지 않은 관객들이 와서 작품을 완성했을 경우 굉장히 의미가 있는 거죠. 그런데 작가는 마음에 안 들어 할 거에요. 그렇죠? 그런데 이렇게 한다면 사회참여프로그램이라는 미명아래 그들의 노동력을 착취 했다기 보다 그들의 창작들의 우연성의 효과들을 빌어서 자기작품에 도입해 보는 이런 전략이 될 수 있는 것이죠. 남들의 참여, 이런 것들이 유명무실해 지는 경우가 될 수 있다 이거죠. 그런 부분들은 작가가 고민해볼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굉장히 독특한 발상이고 그게 결과물이어서 그렇고 결국은 전시를 하기 위해서 작품이 결과로 남는 것보다는 전시를 하면서 이루어 졌으면 좋겠다. 그림이 그려져 있어서 정말로 커뮤니티 프로그램, 관객과의 참여프로그램을 하려고 한다면 텅 빈 캔바스가 놓여 있고 이것을 뭐 지시문이 있어서 여러분 마음대로 하십시오. 해서 전시 기간 중에 끝나는 이런 것들이 더 의미가 있지 전시를 하기 위해서 그 과정은 사람들이 잘 모른다는 것이죠. 그러면 그 과정을 어떻게든지 텍스트로 설명하거나 서문에 집어넣거나 해서 관객에게 알려주어야 의미가 좀 산다는 것이죠.
홍경한 : 사실 전 주위 작업을 하는, 그 올해의 작가상까지 올라간 그 친구 누구지? 성호샘? 그 작가가 전주에서 한 시장에서요 다른 사람이 그린 초상화를 자기가 살짝 덧칠을 해서 팔아요. 실제로 그래서 주체인 그 개인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거나 그 자체로 선택만 했을 때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컨템포러리 기초적 상황을 잘 제시하고 있고 아..또 그 누구더라 그 양반은 반고흐나 이런 입체화 화가들의 작품을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들에게 모작을 하게하고 살짝 가필을 해서 그냥 개인전을 해요. 그래서 OCI에서도 하고 그렇게 해요. 여기서의 문제는 여기 고충환 선생님이 마지막 부분을 참 잘 썼는데 주체가 흔적으로 남아서 타자들의 전체일수도 있다는 이 지점. 저도 이 부분이 딱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해요. 지금의 목선혜 작가 인사동에서 직접 전시도 봤고 제가 기획한 전시에 참여도 하셨고 몇 번 볼 기회가 있었는데 작업프로세스 과정에서의 주체가 주체로서 남는 것이 아니라 타자화 되거나 타자가 주체가 되는. 그러나 그 궁극적으로 그 키워드를 쥐고 있는 것은 작가가 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체가 흔적으로 남아서 타자의 전체일수 있을 때 그 타자성이 과연 어디서 발현되는지. 그들의 역할. 고충환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그 부분인데 그들의 역할이 어디까지이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는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왜냐하면 온전히 작가 혼자에게서 완성되는 게 아니라는 전제에서 봤을 때 그 결국 타자의 발견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그 타자의 발견을 우리가 어떻게 해석을 할 수 있는지 그 여지는 어디서 보이는지가 이 일렬의 작업 시리즈를 찍는 방점이라고 저는 보거든요. 그리고 그건 작가가 선정을 해줄 필요가 있는 거겠죠. 시각적 변주 말고 그 안에 담겨 있는 긴자신감이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우리가 이 작품에서 타자성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되는 걸까요? 그것이 가지고 있는 가치는 어느 정도이고 작가는 과연 그것을 어느 정도로 상정시키고 있는지. 이건 목작가님이 말씀해 주셔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김성호 : 그 경계되어야 할 부분이 어디냐면 그와 같은 창작태도는 무엇이 문제냐면 일반인들, 참여한다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들의 생각과 의욕을 얕잡아 볼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죠. 거기서 우연성의 효과나 생각하지 못한 것을 이끌어 낸다는 측면도 있다 하겠지만 제가 볼 때는 결국 가늠하는 것은 작가라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는 것이죠. 한 예로 홍경한 선생님께서 그 예를 잘 말씀해 주셨는데 유명한 작가 중에 그런 사람이 있어요. 체프만 형제(Jake&Dinos Chapman)라는 작가 중에 이를테면 경매나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 유명한 작품을 사는데 굉장히 비싼 가격에 삽니다. 그 작품 위에다가 자신이 가필을 하는 거죠. 그래서 그걸 파는 건데 그런데 원래 재료 자체도 고가구요. 선생님은 허접한 거에요. 선배에게 얻은 거 이런 걸로 하지만 전략적으로 체프만 형제의 전략과 틀린 거죠. 무언가 시간의 깊이도 그렇고 지금 역사 속에 발현되거나 발견되진 않았지만, 유명한 작가의 작품은 아니지만 오래된 작품을 비싼 가격에 사서 그림을 훼손시키는 행위를 통해 저작권이라고 하는 민감한 부분을 건드리는 건데 선생님 작품은 그런 게 아니잖아요. 망친그림을 주고 하는 거고 뭐가 뭔지 모를 것이 뒤섞여 나오는 건데 체프만의 경우 더 전략적인 거죠. 저작권의 문제를 가지고 자신이 돈 주고 샀으니까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그것을 망가트리면서 뭔가 자신의 것으로 만들면서 논의거리가 있는데 차라리 회화적 전략이라면 좀 더 좋지 않았을까.
이선영 : 저는 이런 관계에 문제가 타자를 너무 낭만화 시키는 경향도 있을 수 있다고 봐요. 예를 들면 장애인 분들이 하는 작업들과 그것들을 작업을 하는 그런 전시를 한번 쫙 본적이 있었는데 저는 그야말로 타자죠. 하지만 그들의 작품에서 굉장히 재미있고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것들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를 많이 가졌었는데 사실은 장애우들도 우리 비장애인들처럼 그릴 수 있다. 그런 식의 것을 훨씬 더 많이 있었거든요. 굉장히 노력을 많이 해서 하셨겠지만 우리가 타자를 건드려서 하는 그런 것에 대해서 과정을 낭만화 시키는 것에 대한 유혹이 있을 수 있고 오히려 혼자 하는 것보다 더 상투적인 것이 나올 수도 분명히 있다는 거죠.
김병수 : 그 제가 볼 때는 말씀하신 지점들이 조금 더 근원적인 문제가 있었고요. 작가가 뭐라고 말 하냐면 자기가 식물성이라고 하는 출발점을 써놓으면서 식물성의 사유방식들을 회화작업이라고 하는 것과 유기관계를 맺어놔요. 그래서 뭐라고 말 하냐면 마지막에 작가가 여러분이 말씀하신 것처럼 마지막에 처리하는 작가로서 하는 작업을 본인이 그 명칭을 뭐라고 하냐면 가드닝이라고 명칭을 본인이 사용하고 있어요. 그 말이 뭐냐고 회화 작업을 자신이 하고 있다는 주관적인 의식이 자의식이 분명해요. 그런데 그걸 유기적으로 화면하고 연결시킬 때는 뭐라고 연결 시키냐면 가드닝이라고 연결시키고 있어요. 그 방식을 통해서 본인은 세분이 지적하는 부분을 해결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거예요. 엄청난 착각이죠. 아니 그게 낱말이 그 낱말을 두는 순간에 본인은 아 그 문제를 이분들끼리 어떤 지적을 해도 자기는 해결이 됐다고 생각하는 거야.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해결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거죠. 아무리 두 분이 말해줘도 본인은 해결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 유비관계를 맺어서 회화와 회화작업과 본인이 하고 있는 것. 이것을 식물성이라는 나는 왜 느닷없이 여기 식물성 이야기가 나오는지 그것부터가 이상하니까. 그걸 본인에게 물어 봐야 할거 같은데 아까 주신 걸로 미리 예습을 했어요. 리플렛을 읽었는데 쭉 읽어 보고, 아까 말씀하시는 걸 쭉 들었는데 굳이 왜 그게 식물성을 서술을 해야 하는지 그게 좀 고충환 선생님은 전후를 해놓으셨는데 이거 읽어서는 왜 굳이 식물성인지 이게 안 돼요. 그 근거가 계속 무너지는 거예요. 유비관계를 맺어놓고 나서 그 위에다가 자기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데 이런 문제들이 해결이 안 된다니까요? 그 관계설정부터 다시 해 봐 야해요. 왜 식물성인지. 그리고 식물성이라고 하는 낱말가지고 작업은 회화성이라고 하는 관계를 이런 유비관계를 맺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하죠. 전혀 제가보기에는 해결되지 않았는데 본인만 해결 됐다고 생각 할 수도 있어요. 기본적으로.
김성호 : 미정지의 식물성이란 용어는 선생님이 쓰신거에요?
목선혜 : 아..예..
홍경한 : 미정지의 식물이라는게 무슨뜻이에요? 정지하지 않는 뭐 그런뜻이에요?
목선혜 : 예 정지하지 않은:: 그거에요.
홍경한 : 이런 말 써야 돼?
목선혜 : 그때가 한참~ 원래 쉬운 글을 쓰는 것처럼 어려운 게 없어요.
김성호 : 나는 괜찮아요. 나는 미정지의 식물성 괜찮아요. 김병호 선생님 비판하신 거는 굉장히 공감하고 가드닝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돌본다는 거잖아요. 꽃이 야생화와 화훼가 있다면 야생화라고 하는 본래원초적인 식물성은 어긋나는 것이잖아요. 화훼. 우리가 돌보고 가꿔서 인간을 위한이라고 하는 목적에 종속되는 경우가 있는데 식물성 자체가 원래 자율적 속성은 아니잖아요. 식물성이라고 한다면 자연성과 동물성과 대비되는 수많은 그걸 말하는 거잖아요. 근데 미정지, 끊임없는 운동성을 전제한다고 보이고 사람들과 함께 다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네트워킹 되가지고 하나를 만드는 거. 저는 이게 식물계의 한 단면인거 같기는 해요. 동물성이라고 한다면 누가 짓밟거나 먹이사슬고리에서 누가 사라지는 그런 거라면 식물성이라고 보이기는 같거든요. 그러나 마지막에 지적한 가드닝, 화훼라는 거죠.
목선혜 : 저도 그 지점이 하면서도 계속 2012년부터 계속 그리고 지우는 과정을 하고자 했던 것은 정말 한해 지나서 눈 한번 내리면 없어지는 것 같지만 그 안에 흔적이 남아있고 다시 또 튀어나오잖아요. 그 과정을 그럼 다른 사람들이 그리고 지나가면 한해 꽃이 피고 지나가고 또 다른 사람들이 그리면 또 다시 꽃이 피는 그런 시간을 생각했었어요. 내가 회화작업이기 때문에 그 층위라든지 아니라면 물감의 두둘한 재질감을 보여줬을 때 그런 과정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는데 저도 마지막에는 이번 전시 끝내놓고서 가드닝이라는 말 이외에는 적당한 말을 잘 못 찾겠는 거예요. 제가 너무 개입해서 너무 많이 지워버리고 아니면 정말 그 흔적들을 요소 적으로만 남겨놓게 되다보니 원래 생각했던 컨셉에서 상충하는 부분을 느낄 수 있었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싶었는데 정말 고민해볼 좋은 말씀 많이들은 것 거 같아요.
이선영 : 미정지의 식물성이라는 단어가 낯설지만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면 리좀이라는 개념이랑 좀 같지 않을까요? 타자들이 증식하는, 주체가 완전히 제어할 수 없는.
김성호 : 있어 보여~ 있어 보이긴 해요.
홍경한 : 우리 용어들이 이렇게 좀 있어 보이는 게 많아~ 좀 쉽게 . 다 알아 뭔 뜻인지는.
목선혜 : 해가 갈수록 풀어쓰고 있어요, 지금::
홍경한 : 그 작업실에 있는 그 책 다 읽었어요. 지금?
목선혜 : 부지런히 읽겠습니다.
최유진 : 실제로 궁금한 거는 이런 일련의 레이어들이 진짜 의미가 있는 퍼포먼스였어요? 작가에게서? 아니면 그런 과정이 의미를 찾기 위해 필요했던 수단이었던 거예요? 지금 생각해 보면?
목선혜 : 스스로는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해요. 수단적이라기보다는 물론 그 안에서 오는 난감함 들은 되게 많았어요. 아무리 자유를 주어졌다고 하지만 정말 너무 자유스럽게 하시니까 정말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여기서 딱 뗐으면 좋겠는데 막 필 받아서 하시니까 그런 부분에서는 어려웠었지만 아무래도 한번쯤은 시도를 하고 가는 과정은 좀 필요하다고 했을 때에는 스스로는 되게 큰 공부도 됐고 좀 나름의 다음 플랜에 대한생각도 좀 하게 되는 지점이 좀 있었던 것 같아요.
최유진 : 계속 보게되요. 어떡하죠?
목선혜 : 감사합니다.
김설빈 : 네, 더 이상 없으시면 목선혜 작가 크리틱은 여기에서 마무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배우치기
성원성 선생님 : 배우치기에 오기 전 목선혜 작가의 전시를 보고 왔습니다. 보고 오면서 전시장을 들렸다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고, 작품을 보고 생각했던 이야기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한 부분이 선명하게 느껴져서 좋았습니다. 프레젠테이션 녹음을 들으면서 잘 안 들렸지만 그중 누군가 물었다는 질문이 귀에 들어왔습니다. ‘너의 자아가 뭔데’ 오늘은 그 안에서 이야기 할 수 있는 내용을 준비를 해 왔습니다. 녹음이 잘 안 들려서 그러는데 누가 그렸던 캔버스를 주워서 엎은 건가요? 그 자체가 얼마만큼 컨셉에 영향을 주나요? 그 캔버스가 누가 준거에다 덮은 건가요?
목선혜 : 그림을 그리던 작가님이 다른 일을 하시면서 쓰시던 모든 재료를 저에게 선물해 주셨어요. 캔버스 틀, 붓, 물감 많은 재료를 받았는데 캔버스는 아주 잘 그려진 인물이 그려져 있었어요. 작가님이 캔버스를 뜯기 전 사진이나 찍어서 보내주고 나머지는 다 찢고 새로 짜서 쓰라고 말씀하셨는데 원래 잘 그린 그림이 제작되어 있는 편이다 보니 뜯기 애매해서 놔두다가 틀도 너무 잘 짜여있고 천도 좋아서 찢고 새로 짜나 내가 엎어버리나 매한가지라 생각되어 두던 캔버스를 식물성작업을 하기 시작하면서 땅따먹기랄까? 엎고 그리고 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했어요.
성원선 선생님 : 사실 그것을 들으면서 상당히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남의 캔버스에 자신의 그림을 덮어 버린 케이스가 굉장히 많거든요. 컨셉화 하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예전엔 궁정화가 케이스를 보면 선생님이 그리고 난 뒤 제자들이 물감이나 그런 것이 너무 귀하고 비싸니까 목판이건 석판이건 다시 그림을 그리곤 했었어요.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예술적인 정통성이 아니라 목작가님이 어느 쪽으로 가려고 했는가 하는 거예요. 그 자체가 모호하다는 것이 전시장에서 한 세미나의 결과물 이라는 것이죠. 그게 컨셉이 더 중요한 것이다. 과연 작품이 주는 문학성은 어디 있느냐. 작가에게는 모든 한 순간 한 순간이 모두 중요한 경험의 순간이에요. 예를 들어 내가 길을 가다가 풀을 봤어. 잡초를 봤어. 오늘따라 그 잡초가 너무 예쁜 거예요. 그런데 내일 와서 보니까 잡초가 꽃을 피웠어요. 그 다음날 보니 잡초가 늘어났어요. 이런 과정을 보면서 내일은 잡초를 꼭 그려봐야 지라고 생각해 봐야지 하는 것이 행위 자체로 나올 때까지, 결국 캔버스 위에 그것을 그릴 때 까지 결국 인지와 지각의 과정을 그치게 됩니다. 혹시 사랑을 카피하다는 영화를 보셨나요? 굉장히 완성도가 높은 영화이고 그 영화를 보면 재밌는 게 미술가가 해야 할 역할, 행동이라고 하는 것은 반성과 지각이라고 말하거든요. 자기 스스로를 바라보아 지각하고 세상을 다시 반추해 다시 느끼는 것 안에서 예술이 만들어 진다는 내용인데 영화이지만 미술학적 이야기가 많은 영화이니 보시면 좋을 거 같아요. 왜 이 이야기를 하냐면 오늘의 주제로 돌아와 목선혜작가의 방향성에 따라 이게 경험(지각)이 우선일지, 반추가 우선일지에 대한 결론이 날 것 같기 때문이에요. 작가로서 그 선택(지각과 반추),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굉장히 이상적인 형태에요. 그런데 작가가 이상적 형태를 가지고 있다고 실토하는 순간 판단자는 굉장히 모호해 질수가 있어요. 오늘 와서 보니까 목작가님이 아직은 30대 초반의 발을 디뎌서 올라가는 작가로서 중요한 선택의 지점에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하나 더 물어보고 싶은 것 중 하나는 원래부터 페인팅을 했었고 앞으로도 페인팅을 하실 거죠? 설치나 미디어쪽 의 방법론적 전환은 생각하고 있지 않으시죠?
목선혜 : 예, 생각하지 않고 있어요. 4년 전쯤 대학원 졸업 후 설치를 하는 선배와 전통시장에서 공공미술활동을 한 적이 있었어요. 저는 회화 이외의 작업방식에 노출이 적었던 편이라 슬럼프를 겪는 시기에 경험하게 된 설치과정이나 작업에 진행과정에 대한 흥미가 생겨 선배를 도와 함께 활동을 했었고 같이 했다고 생각했는데 2년쯤 지난 후 선배가 절 어시스턴트(assistant)로 생각하는 것을 알고 많이 감정이 상했었어요. 그래서 그때 이후 제가 전부터 하던 페인팅(painting)으로 다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나에게 더 맞는 것, 내가 원하는건 페인팅이란 생각이 들어서요.
성원선 선생님 : 왜 이 질문을 했냐면, 제가 작품을 쭉 보고 목선혜 작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보통의 작가들, 특히 손으로 하는 페인팅 작가들은 거의 즉물적이에요. 그것은 작가들이 가진 시각적인 것 뿐 아니라 몸으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예술가라고 했을 때 조건 중 하나가 내 몸이 얼마나 움직여 만들어 지고 있는가 하는 테크닉(technique)의 문제에요. 페인팅은 붓 자체가 손으로 그 모든 눈을 대신해서 만들어 내는 거잖아요. 조각이나 그 외의 작가들은 조금 더 개념적이에요. 전반적인 외형을 구축적으로 생각해 내죠. 구축적이라는 말 자체가 구조가 없으면 그것이 형성 될 수 없기 때문에 인체를 만든다고 가정하면 단면을 어떻게 할 것이다고 계산하듯 구조적인 게 하나라도 들어가요. 개념이나 다른 쪽은 두말하면 잔소리구요. 그런데 가장 예술가의 원형적인, 전투적인 예술가라 칭했을 때 만들어지는 팩트(fact)는 정말 본질적인 부분이거든요. 저 같은 경우는 그림 그리기가 두려워요. 왜냐하면 내가 원하는 그것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면, 원하는 느낌이 나오지 않으면 두려운데 목작가님은 그 반대가 아닌가 해요. 어떻게 해서 반대가 되었는지 모르겠는데 몸보다 머리가 먼저에요. 그러다 보니 자기 작품에 대한 설명, 그 내러티브(narration)가 자기가 원했던 처음에 던진 화두같이 자아에 대한 표현방식이 아니라 그 자리에 다른 것이 와 버린 것이죠. 그러다 보니 중요도 면에서 설명, 서술자체가 지금 목선혜 작가가 보여주는 것과 다른 것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저는 그 표현한 것들 표출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 왜 식물일까 가 더 궁금했어요. 그 식물성이라고 하는 식물의 사물성, 그 자체에 대한 표현방식이 굉장히 다양하게 나타나거든요.
『식물성의 사유』라는 책에 저자 박영택 평론가가 생각하는 식물성이 제가 생각하는 식물성에 대한 사유와 비슷한 생각을 가졌던 것 같아요. 유럽이나 남미의 작가들은 인간에 몰입하고 동물과 인간이 존재하는 풍경 속에 인간이나 동물에 대한 포커싱(focusing)을 잡는데 동양적 작가들 중 특히 한국, 일본, 중국의 작가들은 식물 자체에 몰입을 해요. 식물이 모티브(motive)가 되는 것이죠. 자연에 대한 숭고사상이나 사군자 등 전통적 미학의 소재가 많았어요. 동물의 경우 우리는 정신적, 정서적 내용을 소화해 대상으로 만들기 힘들지만 식물일 경우 모티브에 대한 두려움 없이 진입이 가능하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 박영택 평론가의 생각이고 저도 동의하는 부분이에요. 한국의 현대 작가들은 도시화, 식물, 풍경이라고 하는 자연적인 것에 대해 욕망해요. 어르신들이 요즘의 작업들을 봤을 때 식물들이 말라죽은 거 같은 것을 옮겨 심어 설치하는 것을 보면“살려놓고나 전시하지”와 같은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식물과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죠. 예전에 자연이란 생명력이고 힘, 식량, 대상으로서 존재했다면 요즘 작가들은 그림에서 나타나는 식물성 자체는 크게 두 가지 상징적 기호로서 꽃이나 현대화 되어 나타나거나, 자기 동일시 된 식물들로 나타냅니다. 대상이나 표현의 특징으로 생각하는 것이죠. 오늘 가서 꼭 봐야겠다고 생각한 게 어떠한 식물을 봐야 하는 가였는데 식물이 안 보인다는 거죠. 그런데 오늘 보고 온 것들을 바탕으로 확신이 생겼습니다.
오늘은 신유물주의를 토대로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전에 서양회화에서 흔히 말하는 정물이나 자아가 삭제된 대상으로서의 인간, 대상으로서의 집, 대상으로서의 식물을 많이 보았다면 신유물주의, 신유물론, 사물성, 사물의 대상성은 생활에서는 더욱 더 자기동일시의 현상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아이스테시스(aisthēsis) 라틴어인데 감각과 지각이라고 하는 것은 독일어로 공부하는 사람에게도 매우 어려운 철학적 단어에요. 이 단어 하나에 철학자 10명 정도가 거론될 정도로 어려운 말인데도 아이스테시스라는 말 하나에 감각과 지각이 의미를 다 내포하는 좋은 단어이구요. 요즘 자기해석으로 가져오는 벤야민(Walter Benjamin), 가타리의 지각과 감각이 뭐냐 하면 지각과 감각은 플라톤 사고(비판적, 분석적사고)와 다르게 동양으로 보면 깨달음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삼라만상을 앞에 두고 경험하고 느끼고 깨달으면서 자기 자신으로 흡수되는 그런 것이죠. 즉 일정의 감성적 지각(심리적)이자 감흥적 지각(몸으로 느끼는)이라고 하는 현대적 의미에서의 이아스테시스는 우리가 아는 이론적이 아니라 미학은 ‘미적판단’을 거쳐야 하는데 이는 관람객을 위한 미적 판단뿐 아니라 작가가 자신의 외부세계를 감성적 지각과 감흥적 지각으로 얻어져진 세계를 신체화 하는(지각의 신체화)작업의 과정속에서 이미 ‘미적판단’이 이루어 진 거에요. 저는 그래서 들뢰즈나 가타리가 말하는 뭔가 어려운 말 한참 보다보면 우리나라 정선의 그림을 통한 (말로 하지 않아도 한 번에 알아볼 수 있는)그런 감각과 굉장히 비슷하다고 느껴요. 지각한다는 것은 존재론적인 것 안에 있어야 합니다. 존재론적 사실 없이 되는 것은 공상이 돼 버립니다. 그래서 예술을 하는 사람이 흔히 지각이라는 단어를 미학적 용어로 많이 쓰는데 사건이나 사실 자체에 대해서 스스로가 어떻게 판단했는가, 판단의 기준점이 나와야 하는 겁니다. 그것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기준점 일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것이 없다면 그것은 지각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에요. 우리가 알 수 없음을 판단할 수 없는 것이고 사실론 적으로 존재론적 가치를 가지지 않으면 내 눈앞에서 본 위기나 무언가가 있어 지각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없다면 지각이 아닌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지각에 더 우선하는 것이 감각적인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지각은 판단, 감각은 몸으로 느끼는 것이기 때문에 생물학, 생태학의 물질적인 것 사이에서 형성된다고 합니다. 포스트비평가들은 미학이 감각에 기반을 둔 논리로 논하기보다 여전히 이성의 논리, 혹은 이성의 논리에 종속된 감각 및 지각으로 대두되었을 것이라 이야기 합니다. 현대미학이라 하는 것은 결국 언어중심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이 기준이 바뀌려면 한참 뒤여야 할 것입니다. 말로 표현되지 않는 것들을 어떻게 말로 표현되게 할 것인가? 본인이 느낀 언어로 표현하는 선문답 같은 이야기, 그 사람의 이야기를 이성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총체적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 언어를 한 순간에 받아들일 수 있는가? 스스로 배운 것, 생각한 것에 의해 걸러질 것입니다. 미학에서 아이스테시스는 20세기, 사물성을 넘어 순수이성에 대한 신앙성에서 멀어지면서 생성된 경험론적인 방식입니다. 칸트([Immanuel Kant)는 취향이란 나눌 수 없는 동질화된, 체화된 취미라 말했습니다. 미적지각이라는 것 자체가 단순하게 이건 내가 좋아 한다하는 게 아니라, 좀 더 근원적인 위상과 자신의 동질성에서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감각적 미학은 예술작품을 해석하는 미적지각으로 몸의 현전에 의한 지각, 상상력에 의한 구조적 지학, 분석적 지각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미학의 이론이 일체화 될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몸의 현전에 대한 지각은 현전의 지각을 가지는 예술작품의 의미는 수용자의 몸을 통해서 출현된다는 것으로 작품이 갖고 있는 색, 질감, 느낌을 통해 드러나게 됩니다. 상상력에 의한 관조적 지각은 해석의 사유로 또 다른 관조성을 넘어서 상상을 통한 관조로 나오는 것입니다. 미학에서는 대상이 존재하고 미를 통해 결국은 사유의 방향성, 형태보기가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미학의 기준점들은 심리적, 사회문화적 문제들과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장 주요한 것이 자기 자신이 느끼는 것입니다. 느낀 것을 이야기 하려면 그 안으로 들어가 체득 되어야 합니다. 들어가 봐야 나왔을 때의 느낌을 알 수 있고, 그 안에 들어가는 것이 경험의 형태입니다. 작가들이 작품을 상상하고 그리고자 했을 때와 다 그리고 나서 완성이라고 하는 것을 하는 순간, 자기가 그린 작품과 서술한 작품의 차이를 볼 수밖에 없음은 생각보다 큽니다.
목선혜 작가의 작품을 보면서 경험으로 습득되고 감각으로 습득되고 지각으로 습득된 것이냐 하는 질문에 충분히 그렇다고 봅니다. 그것이 버려진 캔버스에 그림을 덮은 행위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캔버스를 덮는 행위는 예술사적으로 중요한 개념으로 작가의 죽음을 이야기 할 수도 다양한 방법으로 읽힐 수도 있습니다. 그 코드가 아닌 완벽한 붓 터치와 몸의 작동을 통해 작품이 갖고 있는 스스로 반짝이는 방식을 스스로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시대의 취향이 변화되어도 휩쓸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반추상주의, 신표현주의 형태의 것들로 덮어나가는 것들, 형태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으로 식물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의 경험, 자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좀 더 선명한 주제를 잡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목선혜 작가가 자아를 생각하는 방식은 기억에 대한 추적의 방식을 갖는데 사람마다 어린 시절의 경험으로 추적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목선혜작가의 경우 왜 식물을 그리게 되었는가? 할아버지가 가르쳐 주신 노동의 방법, 생명성, 농사, 그 자체에도 남아있는 식물의 에너지, 자아, 본질을 가지고 있는 가장 큰 기억. 식물과 목선혜를 동일시 시킬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봅니다. 거기에서 나타나는 붓질, 현상들이 시간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베이스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들뢰즈는 감각적인 부분, 몸으로 생각하는 것을 따라가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고 말합니다. 생명력을 말로 할 수 없는데 어떻게 말로 할 수 있는가? 몸을 통해 현상학적으로 드러내는 것. 그 에너지가 그 상태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유물론적 사고는 진동처럼 발생합니다. 이 진동하는 것은 어떤 사람에게는 예술이 될 수 있는 사건입니다. 결국 예술은 감각과 지각이라고 하는 이 두 가지의 것을 다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신체적 지각을 어떻게 뇌에서 내 경험을 통해서 어떻게 밖으로 드러내는가 하는 것입니다. 대상은 동일합니다. 폭포수 아래에서 찍은 이미지가 누가 찍는가에 따라 아이스테시스가 더 중요한 것이 됩니다. 추상적인 인식, 느낌 안에 있을 때 말할 수 없는 어떠한 것들이 사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불질로 현상학적 질. 현상학적 질적 상태인 것입니다.
추상이라고 하는 것은 미술적 용어로서의 추상이 아닌 추상적 인식은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추상적 인식이라 하는 것이 개인적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목선혜 작품의 방식들은 지워나가는 것입니다. 모티브가 있고 여러 가지 색, 계획해서 그린 부분과 남들이 그림 부분을 덮고 덮히는 과정을 보면서 의식화된 추상화과정을 떠올립니다. 베이컨(Francis Bacon)과 같은 경우 두 경우가 공존하죠. 의식적인 추상과정을 통해 본인의 내면을 비형상화 시킵니다. 베이컨은 감각적 측면이 주체가 느끼는 몸으로서 표현되는 아이스테시스를 갖고 있습니다.
목선혜 작가의 작품에는 색이 있습니다. 식물이라고 생각했을 때 떠올리기 힘든 굉장히 강렬한 색감으로 감각적인 색채, 내면적 색채로 나타나 있습니다. 식물이 가지고 있는 모티브도 그렇고 과연 그런 것들이 어디서 왔을까를 추리해 볼 수 있습니다. 베이컨의 작품에서도 공간을 비어놓거나 3면화를 그리거나 신체의 일부를 지워버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베이컨 자체가 신유물론적 대상성을 택했다면 목선혜작가는 그것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식물을 택했다면 그것에 대해 자신이 서술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감각적인 논리로 전달되는, 대상이 현현하는 감각의 현현이 경험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만 더 생각해 본다면 그것이 방향성이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목선혜 작가의 이전작업, 교육을 통해 이미 많은 작품을 보았고 자신이 가야 할 지점이 왔는데 그렇기 때문에 충분히 거기에서 드러나는 것이 경험적인 식물에 대한 사유, 사회적 측면에 대해 바라보아야 합니다. 지난번 세미나에서 그 부분에 대해 이야기 하지 못했고 질문을 가지고 있으나 답하지 못하고 있음에 대해 이제는 답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베이컨 역시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 주제적 측면을 보면 벨라스케스에게서도 나왔고 모든 것이 체험되고 경험되어 나오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 것을 그려내는 것을 하려면 식물이라는 모티브만으로는 좀 약합니다. 식물에 대한 스터디, 경험을 해야 합니다. 식물자체가 중요하다면 그것에 대한 이야기가 명확하게 있어야 합니다. 자기의 아이스테시스를 가지고 있어야 하고 거기서 식물은 이야기 안 되고 캔버스로 가려버리게 되면 가벼워지는 것입니다. 도록에 쓴 글은 식물성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에 이질적으로 보입니다. 그리는 방식은 굉장히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합니다. 수정, 자기검열의 방식으로 쓰일 수도 있고 그것에서 쓰인 색이나 표현의 방법이 차용에서 왔다 갔다 하는데 그것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림은 그림대로 그려도 되지만 자기가 왜 그렇게 그렸는지에 대한 의미는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목작가가 이번 기회를 통해서 자기를 찾아가는 길을 갈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작가가 많은 노출에 취하게 되는데 방어하지 않는 것도, 방어하는 것도 포기하는 순간 자신이 처절히 깨집니다. 식물들처럼 에너지가 많은 그런 것들이 보이는데 하번쯤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목선혜 : 노출되는 것에 대한 부담감을 갖고 있었어요. 그래서 처음에 이음활동이 매우 어렵고 거부하고 싶은 마음도 많이 들었던 게 사실이에요.
성원선 선생님 : 감각적인 그림이 많이 드러납니다. 분명 이것이 본인이 가지고 있는 내재된 것이 있고 본인이 서술하지 않은 것(스스로 몰라서 그럴수도 있고 알고 있다는 것 자체를 배제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자신의 미의 기준에 대해 ー식물은 왜 힘없고 초록색이고 그래야 하나요ー라고 반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 식물이면 서정성을 이야기 하는가, 왜 내가 이렇게 분도의 식물을 그릴 수밖에 없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목작가에게 매우 중요한 것은 감각이라는 것입니다. 남의 것을 읽으려 하지 말고 자신의 것을 말하세요. 붓질이 가는 것이 스터디를 한 것인, 선천적인 것인지 스스로 알아야 합니다.
한대희 작가 : 5살 때부터 미술학원에 다녔다고 해요.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이 내재화가 되어 있어 구분하기 힘들거 같아요.
목선혜 :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본인의 작품을 중심으로
The Study of Expression reflecting on trauma in Paintings
-Based on My Work-
본 논문은 2005년부터 2008년까지 제작한 본인의 작품을 중심으로 작업에 기저로 작용한 트라우마에 대하여 그 의미를 살펴보고, 작품에서 고착된 트라우마가 콤플렉스로 발현되는 과정에 대하여 제작 동기와 형성배경 탐구에 그 의의가 있다. 이 논문을 작성함으로 자의식과 정체성의 확립에 있어 타자의 영향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 본인의 작업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봄으로 앞으로의 작업방향을 제시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작업은 유년시절의 기억에서 출발한다. 가정이라는 작은 사회 안에서 발생된 문제는 점점 더 큰 사회에서도 반복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는데 이러한 현상이 주체성의 결여임을 자각한 후 자아정체성의 탐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2005년에서 2007년에 제작된 조용한 숨 연작은 타인에게 받는 억압적 상황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억압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지는 안정감에 숨어 타인의 삶을 살기 원하는 본인을 발견하고, 주체의 고민에 있어 모든 성장과정에서 덧입은 타인과의 관계를 제거하여 개체로의 자아정체성에 대한 문제제기의 과정이었다. 2008년부터 진행된 레드페이스 콤플렉스 연작은 내면에 대한 고민으로 자신에게 집중하기를 요구했던 조용한 숨 연작에서와 다르게,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정체성에 많은 영향을 준 것을 인정하여 주체의 내면과 외부적 상황에서 벌어지는 차이로 발생되는 콤플렉스를 회화화 한 것이다.
본인에게 작품은 시간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는 트라우마의 발견과 그를 작품에 표현함으로 얻은 심리적 치유의 과정, 자아 정체성에 탐구로 진전되었다. 앞으로 진행될 작품의 전반적인 목표는 작게는 개인의 주체성을 찾아 자아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고, 크게는 이러한 작업이 본인에게 국한되는 것이 아닌 표현된 작품을 바라보는 동시대인들에게 같은 고민에 대하여 생각할 단초로 작용하고 그 과정 안에서 정서적 안정을 함께 하는 것이다.
2009 전체논문보기This paper has its significance in finding the meaning of trauma based on my works from 2005 to 2008 and investigating the production motive and formation background in the process of trauma altering itself to complex.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herefore to think about the influence of another person on the establishment of self-consciousness and identity and present the course of my work by pulling my thoughts together.
The work sets out from memories of my childhood. The problem that begins in a "small society" called family is found again and again in a bigger society. Recognizing that this phenomenon results from lack of identity, I began to make researches on ego. "A Silent Breath" sequence made from 2005 to 2007 is about one who cannot break from suppressing situation and wants to live another's life, hiding in the comfort which is compensated from the suppression. It is the process of the subject cutting himself from all the relationships with others and raising the question of self-identity. Unlike "A Silent Breath" sequence which requires that every attention be focused on himself due to his inner agony, the "Red Face Complex" sequence, which has been underway since 2008, makes a caricature of the complex arising from the difference between the internal and external situations of the subject, admitting that the incidents, which happen from the relationship with others, exert great influence on identity.
To me, the work shapes out to the discovery of imperishable trauma, the course of psychological cure by expressing the trauma in the work, and investigation into self-identity. The overall goal of my future works is to search for individual subjecthood and establish self-identity on the one hand and to afford a chance of thinking about the same concerns to my contemporaries on the other. I hope they find peace in the process.
여성주의 미술을 중심으로
Study of Decentering in Modern Art
-With Feminist Art as the center-
현대예술은 자율과 개방을 기초로 도전적이고 병리적인 작품을 선보이고 관객의 적극적 참여를 이끌어 낸다. 예술의 가학적이고 탈권위적인 시도는 금기의 영역을 파괴하고 억압의 구조는 급속한 해체현상을 겪으며 다원화의 모습을 드러냈다. 본 논문은 현대미술의 이러한 현상들에 대하여 자끄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를 필두로 예술과 철학에 있어서의 해체주의 현상에 대하여 알아보고, 시각예술에 있어서 억압에 대한 회귀개념인 ‘언캐니(uncany)’를 통해 탈중심화 현상을 살펴 볼 것이다.
근대와 함께 형성된 주체의 발견과 광학의 발전, 부르주아의 등장은 회화에 동일성의 해체를 불러 일으켰고, 이제 예술은 역사적 인과의 연속성에서 시대의 인식소(epistēmē)에 의해 분절적 성격을 갖게 되었다. 근대 이후 주체의 발견과 함께 부흥했던 형이상학의 구축적 질서는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이후 이성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와 이에 대한 반성을 통해 전복의 태도로 귀결되었다. 이후 자끄 데리다의 형이상학 체계에 대한 전면적 부정과 프로이트(Freud, Sigmund, 1856∼1939)의 무의식을 통한 정신분석학의 등장은 예술의 탈중심화에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다다이즘은 레디메이드와 프로타주, 오브제 등의 새로운 기법의 출현을 통해 전승된 회화와 미술의 관행에 대하여 실험과 반미학적 의지를 표출하기 시작했고, 초현실의 반이성은 회화의 동일성을 해체하는 계기가 되었다. 팝아트의 등장은 대중문화와 예술의 결합인 패러디와 대중매체의 차용을 통해 모더니즘의 가치부정과 예술작품의 아우라를 파괴하는 시도를 가져왔다. 이 시도는 환영 주의적 재현의 거부를 가져와 예술 개념의 확장을 가져오게 되었다. 모더니즘의 부정으로 발생한 포스트모더니즘은 거대담론에 집중해있던 예술의 시각을 미시담론으로 옮아가게 되었다.
본 논문은 ‘트라우마’가 미시담론으로의 관심에 중추적 역할을 하여 현대미술의 가속화를 가져왔다고 본다. 이에 오늘날의 다양하지만 때로는 신경증적이고 정신 병리적 증후를 보이는 현대예술의 인식소를 ‘트라우마’로 보고 철학의 실존주의적 개념인 동시에 문학적 개념이기도 한 ‘언캐니’를 통해 풍부한 개념과 분석의 틀로 현대예술의 탈 중심화의 연관성과 영향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하나로 규정지을 수 없는 현대예술의 탈중심화 현상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술로 여성주의 철학과 미학의 분석을 통해 억압의 분출로 탈중심의 특징을 가장 잘 표현한 작가로 프리다칼로(Frida Kahlo, 1907∼1954), 루이스 부르주아(Louis Bourgeois, 1911∼2010), 니키드 생팔(Niki de Saint Phalle, 1930∼2002), 안나 멘티에타(Ana Mendita, 1948∼1985), 낸 골딘(Nan Goldin, 1953∼)을 중심으로 여성주의 미술에 대하여 탐구하였다.
2012 전체논문보기Based on the concepts of freedom and openness, modern art exhibits challenging and pathological artworks and draws active involvement from viewers. Harsh and non-authoritative attempts of art are destroying the taboo area, and the suppressive structure is experiencing rapid dissolution, which results in the emergence of diversification. This paper will discuss the phenomena of deconstruction in art and philosophy, starting from Jacques Derrida (1930~2004). In addition this paper will look into decentering phenomena through ‘uncany,’ the concept of returning to suppression.
The discovery of identity, development of optical science, advent of bourgeois in modern times brought about dissolution of identity in paintings. From continuity in historical cause and effect, art got segmented characteristics by episteme. Since modern times, the constructive structure in metaphysics has risen with the discovery of identity. But after World War I and II, as a result of having raised the underlying issue on reason and introspection about this issue, this constructive structure was overthrown. Since then, Jacques Derrida’s blanket denial of metaphysical structure and the advent of Freudianism by Freud, Sigmund (1856~1939) have played pivotal roles in decentering in art. By introducing new techniques such as readymade, frottage, and objet, Dadaism expressed anti-aesthetic and experimental spirit against traditional art. Anti-reason of surrealism became the chance of dissolving the identity in paintings. The appearance of pop art made an attempt to deny the value of modernism and to destroy the aura of artworks by using parody, the combination of art and pop culture, and borrowing pop culture. This attempt caused rejection of apparitional recreation, and this resulted in the expansion of art concept. Post modernism, which was emerged from the denial of modernism, moved the artistic perspective from macroscopic discourse to microscopic discourse. This paper takes the view that trauma played a pivotal role in drawing attention to microscopic discourse, and this resulted in acceleration in modern art. Looking episteme of modern art, which is sometimes showing neurotic and pathological symptoms, as trauma, with abundant concepts and analysis this paper looks into association and influence of decentering in modern art through uncany. Uncany is the concept of both philosophical existentialism and literature. Through feminism and analysis of aesthetics, Frida Kahlo (1907~1954), Louis Bourgeois (1911~2010), Niki de Saint Phalle (1930~2002), Ana Mendita (1948~1985), and Nan Goldin(1953~) exhibited the characteristics of decentering with the eruption of suppression. Focusing on these artists, this paper will study feministic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