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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목선혜의 작품을 보는
새로운 시각과 해석

식물은 힘의 흐름과 공간의 구조, 시선의 운동성과 물질적 존재감을 담보하는
탁월한 대상
이며 이를 작가만의 회화적 이야기로 풀어냈다.

유진상_ 2012 목선혜 개인전 작품 평론중에서

(계원예대 교수) 미술평론가

그의 그림들은 식물성의 생경한 회화적 번역으로
긴장을 조성하면서 동시에 건강한 생존을 설파한다.

조명식_ 2013 목선혜 개인전 작품 평론중에서

(국민대 교수, 철학박사)

Essay



사람의 땅은 욕망의 땅이다.
종이 하나에 도장하나 꾹 눌러 찍으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땅에 집을 짓고 가꾼다. 내 것이라는 종이 안에서 시작된다.

#1

착한 아이컴플렉스. 타인의 의지에 자발적 반응으로 얻어낸 칭찬이라는 보상은 어린 시절 나의 존재를 확인하는 방법이었다. 할머니를 도와드리기 위해 호미와 물조리를 잡았다. 재래식변소를 지나 다 떨어져 나갈 것 같은 밭으로 통하는 문을 열면 집에서 소일 수준으로 보기에는 넓은 밭이 펼쳐져 있었다. 할머니와 함께, 봄볕에 부드러워진 흙을 호미로 한번 긁어 올렸을 때 징그러울 만큼 자잘하고 많이 끌려나오던 달래뿌리를 보며 흐르는 웃음에 얼굴이 발갛게 달궈져 탄성을 지르던 기억이 난다. 그저 어린 시절의 봄. 식물은 나에게 수확의 즐거움이었다. 처음엔 앵두, 밤, 대추처럼 계절에 따라 입이 즐거워지는 것이 채집의 즐거움이 있었다. 손가락 마디가 조금씩 길어지면서 입의 즐거움과 함께 가꾸는 방법을 배우게 되었다. 영양분을 위해 비료를 뿌려주고 때에 따라서는 병충해를 막는 약을 뿌리기도 하고 비에 젖은 옥수숫대를 세워주기도 했다. 그렇게 취하기 위한 노력과 노동의 가치를 알아가게 되었다.


#2

시장 통 할머니들이 오늘도 물을 길어 남의 땅에 심은 자신의 작물을 살피러 가신다. 창문을 열고 누워 있다 보면 카트 끄는 소리에 눈이 떠진다. 작업실 너머의 땅 주인은 서울 사람이라 들었는데 그곳에는 적어도 열 명은 족히 넘어 보이는 이들이 가꾸어 먹을 자신의 작물을 지극정성으로 돌본다. 밭을 일구며 옆집 대소사에 감 놔라 배놔라 갖은 참견을 하느라 여간 북적이는 게 아니다. 재미있는 것이 가꾸는 곳임과 동시에 나물을 다듬고 난 찌그래기나 땅콩껍질같은 것을 버리기도 하는 일종의 퇴비장이기도 하다. 가꾸어지는 작물과 스스로 크는 풀들의 뒤엉킴, 자라남과 썩어감의 동시상영. 사람의 흔적이 조금씩 뜸해지는 시간대 내려다보는 그 땅은 식물의 땅이다. 사방 조용하지만 그네들 의 방식으로 땅따먹기가 진행된다. 이러했던 식물의 땅이 단 며칠 만에 땅주인의 의지로 조약돌로 잘 포장된 욕망의 땅이 되었다. 무언가가 밀려버린 땅에 대한 이미지는 생경하지만 대수롭지 않다. 새로운 무언가가 들어서기 전 으레 있음직한 일이기에 큰 눈길을 끌지도 않는다. 하지만 시간이라는 힘을 받고 돌 틈을 밀어내는 어린 싹의 발견은 그저 스쳐가는 것이 아닌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대상을 더듬거리는 발견의 시작이다.




식물의 땅

식물은 에너지가 확장해 가는 형태에서 강렬한 힘을 찾을 수 있다. 이 힘의 흐름은 공간의 구조와 시선의 운동성, 물질적 존재감을 잘 드러내고 이러한 내적 조건을 충족시키는 대상으로 식물은 작업의 모티브가 된다. 나는 모티브로서 조우한 식물과의 지속적 교감을 주요한 회화적 표현의 주제로 삼는데 식물의 이미지 보다는 식물 하나하나의 감성과 감각을 시각화 시키는 것을 중요시 한다.

화면에 그려지는 식물들은 부드러운 수동적 이미지 보다는 무질서의 질서를 스스로 만들어 내는 강인한 식물들이다. 나대지나 골목 귀퉁이 어디 즈음에나 있을법한 것들로 개별적 특성이나 용도가 잘 드러나지 않는 식물들이 대부분이고, 때때로 사람들의 경작욕구를 채워주는 것들도 등장한다. 이런 모티브들에 대한 심리적 반영은 개인의 작업이 아닌 타인과의 협업방식을 취하여 서로의 신체적 반응의 흔적을 유기적으로 보여준다. 식물에 대한 참여자 개개인들의 경험과 지각은 기억을 통해 추적되고 회화표현을 통해 표출한다. 몸으로 생각하는 것을 따라가는 과정 안에서 그 에너지의 상태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현대적 의미에서 아이스테시스는 미적판단을 거쳐야 하는데 이 미적판단은 자신의 외부세계를 감성적 지각과 감흥적 지각으로 얻어진 세계를 신체화 하는 지각의 신체화를 통해 나오는 작업일 수밖에 없다.

화면안에 시지각으로 느껴지는 참가자 사이의 자율적인 서건의 기록행위를 통해 신체는 신체로서 작용한다. 이런 과정에서 시지각은 지움과 유보를 결정하는 태도로 나타난다. 타인과의 자리 내어주기 행위는 지속적 상호작용의 결과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화면은 색채들이 비벼지고 뭉그러지는 사이에 문득 모호한 형태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화면에 남는 것은 지워져 버린 원본의 조각들과 더해진 무계획적인 안료의 단층이다. 단층 위로 드러난 뭉그러진 형태들 사이에서 무엇이 사람인지 무엇이 나무인지의 구분은 불분명해진다. 이 과정은 다층적 레이어의 중첩으로 비현실적 공간을 만들어 내고 타인의 붓질과 작가의 붓질 사이에 발생하는 긴장감이 화면에 흔적으로 남는다.

두 주체가 시간차를 두고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는 그리고 지워지고 덧그려지는 작업의 방식은 폭력적이다. 양해를 구하는 것도 아니고 어느 부분을 채우고 들어갈지도 모르는 이 행위는 식물의 존재방식과 같다. 익명적 개체들을 의도적으로 화면 위에서 모아 다루고 있는 것으로 잊혀 지거나 방치된 상태에 대한 기록이기도 한 동시에 식물이 가진 생명의 환기와 시듦의 극복을 드러내는 묘사이기도 하다. 이는 스스로 자라나는 식물의 속성처럼 참여자들의 흔적을 의도적으로 화면에 모아 사건을 기록하여 삶의 방식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다.


미정지의 식물성

차이의 변주

미정지의 대지는 나의 호기심을 이끌어낸다. 대지안의 식물들 그것의 생태와 분류에 대한 지적 호기심보다 존재 자체에의 호기심으로 시지각적 요구라가 보다는 촉각적 동인에 기인한다. 생활주변의 이름 모르는 풀로부터 스스로의 향기로 어필하는 허브에 이르기 까지 요즘 나의 관심은 온통 식물이다. 디지털 인식소로 충만한 현대미술의 현장에 왜 식물을 끌고 나오려는지 스스로에게 자문하면서, 그 이유를 회화로 적어가는 것이 이번에 선보이는 작업의 줄기이다. 그러면 이렇게 식물성을 현상화하고자 하는 사유의 뿌리는 무엇일까? 나는 그것조차도 회화로 번역하는 과정에 도출되는 신체성과 조형소의 물리적 관계, 그리고 심리적 교감의 흐름을 주목하면서 찾고자 한다.

이와 같은 작업의 당위가 회화 안에 결과로 드러나 시지각적 분석과 고찰로 판단될지는 미지수인 채 작업을 진행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인류의 인식은 현상의 모조와 정보의 가장에 대하여 계몽과 반성의 태도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한편으로는 시지각적 양식의 편견을 지우면서, 또 다른 촉각으로 주변을 바라보기와 이를 회화로 번역하는 과정을 주목하기로 하였다. 이와 같은 비정주의 의지는 더 이상 구축적 현상화로는 다원적 현상이 지시하는 불가공약적 존재의 현존을 설명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앎으로 무엇을 특정하고자하는 오류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미분류의 유지 또는 지속적 상호작용의 유지는 마치 호흡과 혈행과도 같은 것이며 나의 작업의 동인이 되는 것이다.

있음과의 조우 그리고 회화적 촉수로의 교감은 조형행위로 존재를 알아가는 과정의 미학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인식된 주변과 미지 사이의 모호함 그러나 이 또한 존재가 아닐까? 식물의 흔들림을 통해서 나는 바람과 향기를 주목하는가? 아니면 식물 자체의 생물학적 특성의 상대성을 바라보는가? 그리고 이와 같은 바라보기를 회화로 번역할 때 어떤 태도를 견지해야하는가? 이러한 물음에 나는 신체로서 작용하고 시지각은 그 다음에 지움과 유보를 결정하는 태도로 진행된다. 이와 같은 이유로 나의 그림은 촉지적이고 심리적이다. 예정하거나 결과하는 것의 만족보다는 과정의 변주 그 자체에 만족하는지도 모르겠다. 마치 살아있음과 함께함 알아감 그 자체가 행복일 수도 있다는 것, 인식은 가장과 특정된 구축으로 오염될 수 있다는 그래서 오히려 상호작용 그 자체로 존재의 현존을 촉각하고 싶은 것이다.

생명력의 환기와 시듦의 극복 이는 식물을 소재로 다루면서 받은 교훈이다. 나의 화면에서 식물성은 관계의 상대성과 나의 심리 그리고 심리를 반영한 신체의 반응으로 나타난다. 이는 식물을 정보로 가져오거나 분류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의 관계에서 하나의 생명체인 인격으로 바라보려는 태도이다. 바라보기와 느끼기, 느낌의 공유와 하나 되기 이 쉽고도 모호한 것을 나는 회화로 번역한다. 미정지의 회화적 번역은 그래서 선명할 수도 없고 익숙하지도 않다. 다만 다가감의 설렘과 회화적 호흡 그리고 감성의 이끌림이 확인될 뿐이다. 이와 같은 행위의 기록으로 나의 회화는 나신처럼 부끄럽게 홍조를 띄고 낯선 공간과 시선 앞에 선다. 또 다른 설렘과 다가옴을 기대하면서. 목선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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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tique




2012 Herb Scape

목선혜의 회화_ 회화 프로젝트, 회화는 어떻게 주체가 되는가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2012 허브스케이프, 미정지의 식물성. 작가는 식물을 그린다. 엄밀하게는 식물성을 그린다. 그 식물성은 미정지의 식물성이다. 외관상 식물은 정지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외관상 미정지의 식물성은 오문인 것 같다. 외관상이라고 했다. 이 문장이 오문이 되지 않기 위해선 외관상이 아닌, 내면성이 되어야 한다. 작가는 말하자면 외관상 식물처럼 보이는 식물을 그리는 것에 관심이 없고, 식물을 회화적으로 재현하는 일에 관심이 없다.

내면성 곧 내면의 눈을 통해서 본 식물을 그리는데(다르게는 식물과의 교감을 그리는데), 여기서 내면성은 임의적이고 자의적이고 특히 주관적이다. 그래서 외관상 식물처럼 보이는 식물의 형태에, 식물의 재현 곧 감각적 닮은꼴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 식물성과 내면성은 하나로 통한다. 여기서 식물성은 식물의 몫이고, 내면성은 작가에 속한다. 각각 식물에서 작가에게로, 그리고 작가 쪽에서 식물에로 건너가고 건너온 것들이 교차되면서 교감이 일어난다. 그리고 작가는 바로 그 교감을 그린다. 그리고 그렇게 다시 식물성과 내면성과 교감이 하나로 통한다.

그렇다면 식물성을 지지하고 있는 미정지의 식물성이란 무슨 의미인가. 미정지란 운동성이며 활성(다르게는 항상적으로 이행 중에 있는)이란 의미다. 그게 뭔가. 바로 생명(혹은 생명력)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을 피직스와 나투라로 구분했는데, 감각적 자연을 피직스로, 그리고 감각적 자연을 가능하게 해주는 원인이며 원동력을 나투라라고 했다. 여기서 감각적 자연의 원인이며 원동력으로 치자면 생명(다르게는 에너지) 말고 다른 것일 수가 없다. 그러므로 미정지의 식물성이란 사실은 식물의 생명력에 다름 아니다. 그렇게 다시, 작가의 그림에서 식물성과 내면성, 교감과 생명(혹은 생명력)이 하나로 통한다. 작가는 말하자면 식물과의 교감(식물과 내면 혹은 식물성과 내면성이 교차되는)을 통해서 식물의 생명력(그리고 어쩌면 나의, 존재의 생명력)을 그리고 있었다.

2013-2014 식물채집, 채집공간. 그리고 작가는 식물을 채집한다. 채집은 인위적이고 공간적인 개념이다. 채집이 가능하기 위해선 인위적으로 조성된 공간이 있어야 한다(채집은 분류에 연동된 개념이고, 분류는 물론이거니와 분류에 연유한 개념 이를테면 배열과 배치 역시 공간적 개념이다). 인위적으로 조성된 공간? 인공적인 공간? 바로 자연을 해석한다는 것이며, 인문학적 공간개념으로 자연을 재구성한다는 것(자연의 위상학?)이다. 그렇게 작가는 자연을 매개로 유년시절의 추억을 불러오고, 상실된 자연을 주지시키고(현대인에게 자연은 흔히 상실감의 표상이 된다. 상실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현대인에게 자연과 고향과 원형은 그 의미가 하나로 통한다), 특히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관련한 사회학적 의미를 소환한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 식물은 침실로 그러므로 꿈속으로 소환되고, 내면공간 속에 재구성된다.




2013 식물채집

식물성의 감성회화

조명식 (국민대 교수, 철학박사)

1. 화분을 모으면서 전시를 준비한다. 아직 그림의 이미지가 결정되지 않은 채로 개인전을 준비하는 작가를 만났다. 그는 씨앗을 선별하고 있다. 작년에 실하게 결실한 것들을 잘 말려놓았다가 철을 맞추어 씨를 뿌린다. 원래 철들었다는 말이 농사의 시기를 깨우치고 행동함에서 유래되었듯이 그의 파종은 경험적이다. 그의 작업실은 식물원을 닮아 있다 유리온실처럼 생긴 중정은 물론 옥상정원에 이르기까지 직접 파종하고 기른 식물로 가득하다. 그는 식물의 생장을 관찰한다. 주로 허브인 식물들은 그의 눈에 손길에 길들여진다. 때때로 상에도 오른다. 씨 뿌림에서 관찰과 드로잉, 그리고 섭생까지 동행되는 그의 식물들은 그에게 특정한 가치를 선사하는가보다.

그의 드로잉과 회화는 식물이미지로 가득하다. 왜 식물인가? 묻기가 민망하게 그의 그림은 식물의 채집이면서 식물의 생태로 충만하게 조성되어 있다. 하긴 미술사에서 식물의 이미지를 찾아보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동서를 막론하고 식물과 화훼류는 그림의 소재로 자주 등장하는 것이다. 르느와르, 세잔, 루소는 물론 중국의 거장 리커란(李可染)에 이르기까지 식물은 풍경의 일부로 또는 화면에서 중요한 상징으로 등장하곤 한다. 특히 근대 이후 식물의 형상은 화가들의 관심과 표현영역이 확장되면서 인생을 은유하기 위하여 혹은 주제의 설득력을 위하여 활용되어왔다.

2. 목선혜의 그림에서 식물이 지시하는 지점은 무엇인가? 나는 우선 그의 행동을 통하여 찾아보고자한다. 김희영이 그의 저서 ‘헤롤드 로젠버그의 모더니즘 비평’에서 양식화의 전형으로 가치를 판단하는 것의 위험을 지적하고, 작가의 행동태에 주목하여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제안한 것처럼 그의 그림과 연계된 동선을 따라가 보자. 그는 식물을 시각적으로 관찰함에서 진일보하여 식물과 관계한다. 심고 기르고 돌보는 그 과정이 그림에 스며든다. 어떻게 보면 그는 식물의 정보를 옮기는 것 보다 식물과 함께한 경험들을 나타내고 싶은 것처럼 보인다.

그의 그림에서 이미지들은 부유(浮游) 하기도 하고 재배되기도 한다. 이른바 불특정 화법으로 생경함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일루전을 추구하는 그림과는 현격한 거리두기를 하고 있다. 그는 의지적으로 원근법의 굴레와 명암법의 허울을 벗어 던진다. 그리하여 회화의 역사에서 끈끈하게 행세하던 완성과 닮음 그리고 조화의 기준을 무너트리고 있다.




2012 Herb Scape

식물, 회화의 본령

계원예술대학교 유진상 교수

페인팅에는 항상 두 가지 질문이 따라다닌다. 왜 회화인가? 그리고 특정한 소재를 다룰 경우, 왜 그 소재인가, 이다. 목선혜의 경우는 ‘식물채집’이라는 주제를 통해 회화적 소재로서 도시 주변의 공간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식물들을 다루고 있다. 2013년까지 그려진 대부분의 회화들이 건물이나 도로, 담장 주변의 텃밭이나 유휴지에서 자라나고 있는 식물들을 그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목선혜에게 있어 식물은 도시나 인공적 공간들 주변에서 자라고 있는 불특정한 식물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 식물들은 아직 특정한 성격이나 용도를 지니고 있는 것들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목선혜의 작품들에서 이 식물들의 개별적 명칭이나 생장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들의 목록이나 이들이 지니고 있는 성격에 대한 참조는 그다지 중요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이 그림들에서 식물들의 개체성은 그것들 자체의 생물학적 특이성보다는 그것들이 갖고 있는 형태들에 의해 드러난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어떤 풀들은 화분에, 어떤 풀들은 모판에서 자라고 있으며, 다른 풀들은 나대지의 헐벗은 공간에서 잡초들처럼 자라고 있고, 또 다른 풀들은 마을 근처의 수풀 속에서 띄엄띄엄 다른 풀들과 흩어져 자라고 있다. 어떤 것은 길고 붉은색이며, 다른 것은 짧고 돌려나기로 자라는 잡초다. 다육식물이 있는가 하면 이끼처럼 낮게 퍼져 있는 선태식물(蘚苔植物)도 있다. 이 식물들의 공통점은 온실이나 잘 준비된 화분에서 자라고 있는 존재들이 아니라 정성어린 손길에서 벗어난, 다소 버려진 식물들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목선혜의 ‘식물채집’은 식물에 대한 특별한 관심이나 전문적인 수집과 분류가 동반되는 채집이 아니라 일종의 ‘비유’와도 같은, 아무 곳에나 던져진 익명적 개체들을 의도적으로 화면 위에서 모아 다루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 식물들이 자라고 있는 장소 역시 식물들의 생육을 위한 공간이라기보다는 도시 혹은 마을의 자투리 공간이며, 여기에서 식물이 자라고 있다는 것은 사람들이 이 개체들에 주의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잊혀져 있거나 방치되어 있는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 하겠다.

목선혜가 이러한 공간들에서 자라고 있는 익명의 식물들을 다루면서 왜 이것을 ‘식물채집’이라고 부르는가 하는 것은 그의 회화적 작업방식을 통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목선혜는 두 가지의 특기할만한 방법을 사용하는데, 하나는 서로 다른 질감으로 칠해진 분할된 화면이고, 다른 하나는 기존의 회화적 표면을 덮어 그리는 방식이다. 화면분할은 <채집공간> 연작 등에서 보듯, 식물이 자라고 있는 화분이나 모판 이외의 공간을 지면과 담장, 혹은 원경과 하늘 등으로 구분하여 평면적으로 채색하는 데서 나타난다. 이 경우, 각각의 분할된 면은 과장된 원근법적 경계들로 구획된 상태로 표현될 뿐 색채나 밀도에 있어서는 단적으로 이차원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러한 공간의 구획은 다소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는데, 왜냐하면 이 경우 그려진 공간은 사실적인 장소라기보다는 연출되었거나 관념적이고 우화적인 무대공간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붓터치가 배제된 밋밋한 색면들은 상당히 기울어진 각도에서 내려다 본 것처럼 그려져 있거나 담장들로 둘러싸인 공간으로 그려져 있다. 이런 식의 공간은 ‘식물채집’이라는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주제가 되는 사물이나 혹은 ‘채집’된 여러 개의 사물들을 한 장소에 모아놓고 보여주기 위한 ‘전시공간’으로서의 공간적 특성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목선혜에게 있어 이 장소들이 지닌 의미가 사실적인 기억의 재현으로 머물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여기서의 공간적 재현은 의도적으로 연출된 것들이며, 이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식물의 회화적 등장을 위한 ‘준비된 장소’를 마련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화면분할은 더욱 평면적이거나 패턴화된 붓질들로 채워진 기하학적 구조물들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 화면에 평면적이거나 패턴화된 붓질들이 식물들을 그리고 있는 행위적 붓질들과 공존할 때, 회화적 통일성이나 일관성을 희생하면서 화면이 획득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Interview




2015 창작공간 아르숲 평론매칭

일시: 2015년
작가 : 목선혜
평론가 : 홍경한, 이선영, 김성호, 김병수
큐레이터 : 최유진
아르숲메니져 : 김설빈


목선혜 : 안녕하세요. 입주작가 목선혜입니다. 오늘 평론을 해 주신 고충환 선생님께서 개인적인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하셨습니다. 참석해주신 선생님들께서 빈 자리를 대신해 주실 거라 기대합니다. 준비한 자료는 2015년 작품으로 먼저 작품을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2015년 기준으로 PPT자료를 만들다 보니 작업의 진행과정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04년~11년의 자료는 자리에 팸플릿으로 준비해 두었습니다. 대학부터 대학원 시절까지는 자화상에 대한 작업을 많이 했습니다. 유년에 대한 이야기나 스스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주요 이야기였다면 대학원을 마치고 춘천으로 돌아와 재래시장 한 어귀에서 공공미술프로젝트에 참여하며 페인팅을 벗어난 작업을 시도했습니다. 그런데 약 2년의 시간이 지난 뒤 슬럼프가 찾아왔고 그 과정에서 식물이라는 소재로 회화작업을 해야겠다는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춘천에서 태어나고 자랐는데 어릴 적부터 굉장히 밭일을 많이 하면서 컸어요. 펌프질도 많이 하고 여름부터 가을이면 고추를 말리는 일에 놀다가도 소나기가 오면 집을 뛰어가 고추를 걷었던 일이 생각납니다. 아버지께서는 몇 가지 버전으로 고추말리는 법을 알려주시기도 했고 장마가 지면 쓰러지는 옥수숫대를 묶어 세워두는 일들도 종종 있었어요. 처음은 자화상을 그리지 않고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대상으로 식물을 바라보았고, 식물이 주는 에너지, 유년시절의 경험이 정서적 부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생각되어 2012년 ‘Herb Scapr’를 타이틀로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2013년에는 스스로 크는 것과 키워지는 것에 대한 생각을 ‘식물채집’으로 풀어보았습니다. 작물을 재배하던 입장에서 바라보던 풀. 잡풀 같은 것. 김을 맨다고 하죠, 많은 잡풀을 뽑아버리곤 했는데 이때는 무언가를 키우려고 하던 곳에 터를 내리고 있던 잡풀을 새로운 눈으로 ‘발견’하게 되었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공간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015년도에는 ‘지나친것들’가 ‘Land Of Plants’ 타이틀로 전시를 진행했습니다. ‘지나친것들’에 작업한 작품은 붉은 이미지들이 많고 ‘Land Of Plants’의 경우 푸른 이미지들이 많습니다. PPT에 보이는 이미지는 이 두 전시에 선보인 작품을 한곳에 모은 것인데요, 2015년은 스스로 피어나는 것과 키워지는 것을 하나로 묶어 ‘식물의 땅’을 이야기 하게 되었습니다. 2014년부터 타인의 캔바스 위에 제가 덧그리는 방식으로 혼자 그리는 행위에서의 벗어남을 시도했는데 2015년 작업을 진행하면서부터 조금 더 적극적으로 시민들과 함께 표현하는 작업의 방법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캔바스를 하나의 땅이라 생각하고 시민들의 붓질이 날아온 풀씨라 생각하여 함께 그림을 그려나갔습니다. 시민들의 참여는 제가 쓰지 않는 색이나 때로는 가공되지 않은 선이나 색, 이미지들로 나타났습니다. 프로젝트는 10대부터 80대까지 참여해 주셨습니다. 사진 이미지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림은 상단에 보이는 이미지와 같이 다른 작가분이 그리신 큰 인물 이미지가 이미 그려져 있어요. 실제 춘천에서 전시할 때 3층 전시장은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놓았어요. 체험 후 4층 전시장에 가서 관람을 하시면 보시는 분들이 조금 더 편안하지 않을까 해서요. 타인의 개입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작업이었고 에너지적인 부분을 표현하려고 하는 부분이 많아요. 어떤 분들은 보시면서 식물을 그렸지만 굉장히 동물적으로 느껴진다고 말씀하시기도 하세요. 제가 그리는 것은 대부분 나대지의 풀이나 잡초, 때때로 파나 양상추처럼 키워지는 작물을 그리기도 해요. 타인과의 작업은 서로의 행위들이 가져오는 교차적 시선이나 경험, 색상들이 쌓이고 그 안에서 제가 작업하는 색들과 이미지들이 같이 어우러져 이미지를 만들고 싶었어요. 작업에 대한 이야기는 우선 여기까지 드리고 지금부터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홍경한 : 영상작업도 한다고 하지 않았었나요?

목선혜 : 영상작업은 홍나겸 작가님께서 도와주셔서 진행하긴 했는데 편집이 마무리 되지 않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2015 지나친것들

배우치기

성원성 선생님 : 배우치기에 오기 전 목선혜 작가의 전시를 보고 왔습니다. 보고 오면서 전시장을 들렸다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고, 작품을 보고 생각했던 이야기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한 부분이 선명하게 느껴져서 좋았습니다. 프레젠테이션 녹음을 들으면서 잘 안 들렸지만 그중 누군가 물었다는 질문이 귀에 들어왔습니다. ‘너의 자아가 뭔데’ 오늘은 그 안에서 이야기 할 수 있는 내용을 준비를 해 왔습니다. 녹음이 잘 안 들려서 그러는데 누가 그렸던 캔버스를 주워서 엎은 건가요? 그 자체가 얼마만큼 컨셉에 영향을 주나요? 그 캔버스가 누가 준거에다 덮은 건가요?

목선혜 : 그림을 그리던 작가님이 다른 일을 하시면서 쓰시던 모든 재료를 저에게 선물해 주셨어요. 캔버스 틀, 붓, 물감 많은 재료를 받았는데 캔버스는 아주 잘 그려진 인물이 그려져 있었어요. 작가님이 캔버스를 뜯기 전 사진이나 찍어서 보내주고 나머지는 다 찢고 새로 짜서 쓰라고 말씀하셨는데 원래 잘 그린 그림이 제작되어 있는 편이다 보니 뜯기 애매해서 놔두다가 틀도 너무 잘 짜여있고 천도 좋아서 찢고 새로 짜나 내가 엎어버리나 매한가지라 생각되어 두던 캔버스를 식물성작업을 하기 시작하면서 땅따먹기랄까? 엎고 그리고 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했어요.

성원선 선생님 : 사실 그것을 들으면서 상당히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남의 캔버스에 자신의 그림을 덮어 버린 케이스가 굉장히 많거든요. 컨셉화 하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예전엔 궁정화가 케이스를 보면 선생님이 그리고 난 뒤 제자들이 물감이나 그런 것이 너무 귀하고 비싸니까 목판이건 석판이건 다시 그림을 그리곤 했었어요.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예술적인 정통성이 아니라 목작가님이 어느 쪽으로 가려고 했는가 하는 거예요. 그 자체가 모호하다는 것이 전시장에서 한 세미나의 결과물 이라는 것이죠. 그게 컨셉이 더 중요한 것이다. 과연 작품이 주는 문학성은 어디 있느냐. 작가에게는 모든 한 순간 한 순간이 모두 중요한 경험의 순간이에요. 예를 들어 내가 길을 가다가 풀을 봤어. 잡초를 봤어. 오늘따라 그 잡초가 너무 예쁜 거예요. 그런데 내일 와서 보니까 잡초가 꽃을 피웠어요. 그 다음날 보니 잡초가 늘어났어요. 이런 과정을 보면서 내일은 잡초를 꼭 그려봐야 지라고 생각해 봐야지 하는 것이 행위 자체로 나올 때까지, 결국 캔버스 위에 그것을 그릴 때 까지 결국 인지와 지각의 과정을 그치게 됩니다. 혹시 사랑을 카피하다는 영화를 보셨나요? 굉장히 완성도가 높은 영화이고 그 영화를 보면 재밌는 게 미술가가 해야 할 역할, 행동이라고 하는 것은 반성과 지각이라고 말하거든요. 자기 스스로를 바라보아 지각하고 세상을 다시 반추해 다시 느끼는 것 안에서 예술이 만들어 진다는 내용인데 영화이지만 미술학적 이야기가 많은 영화이니 보시면 좋을 거 같아요. 왜 이 이야기를 하냐면 오늘의 주제로 돌아와 목선혜작가의 방향성에 따라 이게 경험(지각)이 우선일지, 반추가 우선일지에 대한 결론이 날 것 같기 때문이에요. 작가로서 그 선택(지각과 반추),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굉장히 이상적인 형태에요. 그런데 작가가 이상적 형태를 가지고 있다고 실토하는 순간 판단자는 굉장히 모호해 질수가 있어요. 오늘 와서 보니까 목작가님이 아직은 30대 초반의 발을 디뎌서 올라가는 작가로서 중요한 선택의 지점에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하나 더 물어보고 싶은 것 중 하나는 원래부터 페인팅을 했었고 앞으로도 페인팅을 하실 거죠? 설치나 미디어쪽 의 방법론적 전환은 생각하고 있지 않으시죠?



Monograph




2009 학위논문(석사)트라우마가 반영된 회화표현 연구

본인의 작품을 중심으로
The Study of Expression reflecting on trauma in Paintings
-Based on My Work-

본 논문은 2005년부터 2008년까지 제작한 본인의 작품을 중심으로 작업에 기저로 작용한 트라우마에 대하여 그 의미를 살펴보고, 작품에서 고착된 트라우마가 콤플렉스로 발현되는 과정에 대하여 제작 동기와 형성배경 탐구에 그 의의가 있다. 이 논문을 작성함으로 자의식과 정체성의 확립에 있어 타자의 영향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 본인의 작업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봄으로 앞으로의 작업방향을 제시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작업은 유년시절의 기억에서 출발한다. 가정이라는 작은 사회 안에서 발생된 문제는 점점 더 큰 사회에서도 반복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는데 이러한 현상이 주체성의 결여임을 자각한 후 자아정체성의 탐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2005년에서 2007년에 제작된 조용한 숨 연작은 타인에게 받는 억압적 상황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억압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지는 안정감에 숨어 타인의 삶을 살기 원하는 본인을 발견하고, 주체의 고민에 있어 모든 성장과정에서 덧입은 타인과의 관계를 제거하여 개체로의 자아정체성에 대한 문제제기의 과정이었다. 2008년부터 진행된 레드페이스 콤플렉스 연작은 내면에 대한 고민으로 자신에게 집중하기를 요구했던 조용한 숨 연작에서와 다르게,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정체성에 많은 영향을 준 것을 인정하여 주체의 내면과 외부적 상황에서 벌어지는 차이로 발생되는 콤플렉스를 회화화 한 것이다.

본인에게 작품은 시간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는 트라우마의 발견과 그를 작품에 표현함으로 얻은 심리적 치유의 과정, 자아 정체성에 탐구로 진전되었다. 앞으로 진행될 작품의 전반적인 목표는 작게는 개인의 주체성을 찾아 자아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고, 크게는 이러한 작업이 본인에게 국한되는 것이 아닌 표현된 작품을 바라보는 동시대인들에게 같은 고민에 대하여 생각할 단초로 작용하고 그 과정 안에서 정서적 안정을 함께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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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paper has its significance in finding the meaning of trauma based on my works from 2005 to 2008 and investigating the production motive and formation background in the process of trauma altering itself to complex.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herefore to think about the influence of another person on the establishment of self-consciousness and identity and present the course of my work by pulling my thoughts together.

The work sets out from memories of my childhood. The problem that begins in a "small society" called family is found again and again in a bigger society. Recognizing that this phenomenon results from lack of identity, I began to make researches on ego. "A Silent Breath" sequence made from 2005 to 2007 is about one who cannot break from suppressing situation and wants to live another's life, hiding in the comfort which is compensated from the suppression. It is the process of the subject cutting himself from all the relationships with others and raising the question of self-identity. Unlike "A Silent Breath" sequence which requires that every attention be focused on himself due to his inner agony, the "Red Face Complex" sequence, which has been underway since 2008, makes a caricature of the complex arising from the difference between the internal and external situations of the subject, admitting that the incidents, which happen from the relationship with others, exert great influence on identity.

To me, the work shapes out to the discovery of imperishable trauma, the course of psychological cure by expressing the trauma in the work, and investigation into self-identity. The overall goal of my future works is to search for individual subjecthood and establish self-identity on the one hand and to afford a chance of thinking about the same concerns to my contemporaries on the other. I hope they find peace in the process.


2012 학위논문(석사)현대미술의 탈중심화에 관한 연구

여성주의 미술을 중심으로
Study of Decentering in Modern Art
-With Feminist Art as the center-

현대예술은 자율과 개방을 기초로 도전적이고 병리적인 작품을 선보이고 관객의 적극적 참여를 이끌어 낸다. 예술의 가학적이고 탈권위적인 시도는 금기의 영역을 파괴하고 억압의 구조는 급속한 해체현상을 겪으며 다원화의 모습을 드러냈다. 본 논문은 현대미술의 이러한 현상들에 대하여 자끄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를 필두로 예술과 철학에 있어서의 해체주의 현상에 대하여 알아보고, 시각예술에 있어서 억압에 대한 회귀개념인 ‘언캐니(uncany)’를 통해 탈중심화 현상을 살펴 볼 것이다.

근대와 함께 형성된 주체의 발견과 광학의 발전, 부르주아의 등장은 회화에 동일성의 해체를 불러 일으켰고, 이제 예술은 역사적 인과의 연속성에서 시대의 인식소(epistēmē)에 의해 분절적 성격을 갖게 되었다. 근대 이후 주체의 발견과 함께 부흥했던 형이상학의 구축적 질서는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이후 이성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와 이에 대한 반성을 통해 전복의 태도로 귀결되었다. 이후 자끄 데리다의 형이상학 체계에 대한 전면적 부정과 프로이트(Freud, Sigmund, 1856∼1939)의 무의식을 통한 정신분석학의 등장은 예술의 탈중심화에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다다이즘은 레디메이드와 프로타주, 오브제 등의 새로운 기법의 출현을 통해 전승된 회화와 미술의 관행에 대하여 실험과 반미학적 의지를 표출하기 시작했고, 초현실의 반이성은 회화의 동일성을 해체하는 계기가 되었다. 팝아트의 등장은 대중문화와 예술의 결합인 패러디와 대중매체의 차용을 통해 모더니즘의 가치부정과 예술작품의 아우라를 파괴하는 시도를 가져왔다. 이 시도는 환영 주의적 재현의 거부를 가져와 예술 개념의 확장을 가져오게 되었다. 모더니즘의 부정으로 발생한 포스트모더니즘은 거대담론에 집중해있던 예술의 시각을 미시담론으로 옮아가게 되었다.

본 논문은 ‘트라우마’가 미시담론으로의 관심에 중추적 역할을 하여 현대미술의 가속화를 가져왔다고 본다. 이에 오늘날의 다양하지만 때로는 신경증적이고 정신 병리적 증후를 보이는 현대예술의 인식소를 ‘트라우마’로 보고 철학의 실존주의적 개념인 동시에 문학적 개념이기도 한 ‘언캐니’를 통해 풍부한 개념과 분석의 틀로 현대예술의 탈 중심화의 연관성과 영향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하나로 규정지을 수 없는 현대예술의 탈중심화 현상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술로 여성주의 철학과 미학의 분석을 통해 억압의 분출로 탈중심의 특징을 가장 잘 표현한 작가로 프리다칼로(Frida Kahlo, 1907∼1954), 루이스 부르주아(Louis Bourgeois, 1911∼2010), 니키드 생팔(Niki de Saint Phalle, 1930∼2002), 안나 멘티에타(Ana Mendita, 1948∼1985), 낸 골딘(Nan Goldin, 1953∼)을 중심으로 여성주의 미술에 대하여 탐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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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sed on the concepts of freedom and openness, modern art exhibits challenging and pathological artworks and draws active involvement from viewers. Harsh and non-authoritative attempts of art are destroying the taboo area, and the suppressive structure is experiencing rapid dissolution, which results in the emergence of diversification. This paper will discuss the phenomena of deconstruction in art and philosophy, starting from Jacques Derrida (1930~2004). In addition this paper will look into decentering phenomena through ‘uncany,’ the concept of returning to suppression.

The discovery of identity, development of optical science, advent of bourgeois in modern times brought about dissolution of identity in paintings. From continuity in historical cause and effect, art got segmented characteristics by episteme. Since modern times, the constructive structure in metaphysics has risen with the discovery of identity. But after World War I and II, as a result of having raised the underlying issue on reason and introspection about this issue, this constructive structure was overthrown. Since then, Jacques Derrida’s blanket denial of metaphysical structure and the advent of Freudianism by Freud, Sigmund (1856~1939) have played pivotal roles in decentering in art. By introducing new techniques such as readymade, frottage, and objet, Dadaism expressed anti-aesthetic and experimental spirit against traditional art. Anti-reason of surrealism became the chance of dissolving the identity in paintings. The appearance of pop art made an attempt to deny the value of modernism and to destroy the aura of artworks by using parody, the combination of art and pop culture, and borrowing pop culture. This attempt caused rejection of apparitional recreation, and this resulted in the expansion of art concept. Post modernism, which was emerged from the denial of modernism, moved the artistic perspective from macroscopic discourse to microscopic discourse. This paper takes the view that trauma played a pivotal role in drawing attention to microscopic discourse, and this resulted in acceleration in modern art. Looking episteme of modern art, which is sometimes showing neurotic and pathological symptoms, as trauma, with abundant concepts and analysis this paper looks into association and influence of decentering in modern art through uncany. Uncany is the concept of both philosophical existentialism and literature. Through feminism and analysis of aesthetics, Frida Kahlo (1907~1954), Louis Bourgeois (1911~2010), Niki de Saint Phalle (1930~2002), Ana Mendita (1948~1985), and Nan Goldin(1953~) exhibited the characteristics of decentering with the eruption of suppression. Focusing on these artists, this paper will study feministic art.